은혜를 잊지 않은 다윗 (삼하 19:31~39)
옛날에 한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연회장 안의 촛불을 일순간에 꺼뜨렸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한 장수가 평소에 연모하던 후궁을 덥석 끌어안았습니다. 순간 당황한 후궁은 그 장수의 갓 끈을 끊어 손에 쥐고는 왕에게 다가가 자초지정을 말했습니다. 때마침 연회장 한 쪽 끝에서부터 불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장수는 온몸에 힘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왕이 “여봐라, 지금부터는 갓끈을 끊어버리고 놀아보자꾸나.” 하며 자신부터 갓끈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장수들이 갓끈을 끊어버렸고, 그 장수는 “휴우”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몇 년 뒤, 다시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왕도 전투에 나갔는데, 간계에 휘말린 왕이 그만 적의 포위망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게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단기 필마로 질풍처럼 쇄도해 오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온 몸을 던져 적의 포위망을 뚫고 왕을 건져냈습니다. 온 몸에 중상을 입고 헐떡이는 장수에게 왕이 물었습니다.
“너는 누군 관데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나를 구했느냐?”
그러자 장수는 왕 앞에 무릎을 꿇더니
“전하, 저는 일전에 연회에서 전하의 후궁을 겁탈하려고 했던 놈입니다. 그 때 마땅히 죽어야 할 저를 살려주신 은혜를 늘 가슴에 묻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전하를 구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은혜를 이렇게라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 한 컵을 떠줘도 은혜를 잊지 말라.” 이것이 저희 집 가훈입니다. 흐르는 물 한 컵 떠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만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그 은혜를 갚으라는 뜻에서 그리 정한 것이고, 물 한 컵의 은혜도 알진대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죽이시고, 또 우리를 당신의 자녀를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느냐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다윗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다윗은 믿음뿐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여러모로 본이 됩니다. 물론 다윗의 삶에 전혀 오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생을 들여다볼 때 다윗을 향하여 ‘나와 마음이 합한 자’(행13:22)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은혜를 아는 자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아름다운 자임을 드러내줍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마하나임에서 피난을 하고 있을 때 다윗군에게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제공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로글림의 부(富)한 노인인 바실래입니다.
다윗은 그의 공궤에 감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바실래에게 동행할 것을 건의 합니다. 이는 그동안의 은혜를 갚고자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거절하고 대신 바실래의 아들이 다윗과 동행하게 됩니다. 물론 다윗은 바실래의 아들에게 그동안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은혜를 갚았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임종할 때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바실래의 후예를 잘 대우하라고 유언합니다.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왕상2:7). 예레미아 51장 17절에 보면 ‘게롯김함’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김함의 거주지’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베들레헴 근처로, 다윗이 자기 고향 근처의 땅을 바실래의 아들에게 준 것 같습니다. 다윗이 은혜를 갚은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과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의형제로서 친형제 이상이었습니다(삼상18:1~4).
그 요나단이 사울과 함께 길보아산에서 전사했을 때 다윗은 만가(挽歌)를 불러 요나단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삼하1:17~27). 이런 다윗이 수소문 끝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생존해 있음을 알고는 데려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9:7). 즉 기브아에 있던 사울의 소유지를 다 회복하게 하고 왕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은 다윗, 이보다 아름다운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실로 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 은혜를 다윗이 바실래에게 받은 것에 비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에 비교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다윗과 같은 심정이냐는 겁니다. 다윗처럼 은혜를 가슴에 새겨 그것에 감사해서 어떻게든 갚을 길이 없나 하고 찾고 있냐는 겁니다. 물론 그런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사랑을 당연한 듯 여기고, 때론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까맣게 잊고 오히려 툴툴 거리고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주실 때 반드시 되갚으라고 주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갚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실 것이고, 사랑 위에 사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자식에게 베풀고 사랑하면서 “나중에 꼭 갚아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추운 날 털장갑이라도 사가지고 와서 “엄마, 아빠! 지금은 이것밖에 못하지만,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어 꼭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게요.” 한다면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저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한 번 헤아려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 은혜와 사랑에 무엇을 보답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의 은혜에 감격하고 사무쳐 자기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주리고 헐벗으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 맞았고,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듣고도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고백했습니다. 저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기꺼이 한 목숨 내놓기로 작정하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애쓰고 힘쓴다고 해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께 받은 은혜에 비하면 부모님께 겨우 털장갑하나 선물해 드리는 격이겠지만 그러나 제 마음만은 아시리라 믿기에 오늘도 주님의 명령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가룟 유다처럼, 나발처럼 은혜를 잊은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문둥병 열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주님께 찾아와 감사한 자는 한 명뿐이었지 않습니까?(눅17:11~19). 그 아홉 중의 하나가 당신이면 안 됩니다. 은혜를 알고 찾아온 이방인 한 사람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은혜를 알면 영· 혼· 육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가진 명예, 건강, 부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 역시 우리 주 예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설마 그 은혜를 잊고 지금의 고난에 불만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광야를 40년 떠돌며 그것을 깨우쳐야 할 것이며(신8), 그 은혜를 잊고 내가 잘나서 된 줄 착각하면 히스기야처럼 진노를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대하32:25).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할렐루야!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은혜를 잊지 말라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가슴에 새겨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