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는 스스로 긋는 것이다
깜뻬체(Campeche)의 성공적인 집회를 마친 우리는 다음 도시에서 계속될 집회를 위해 쉴 겨를도 없이 짐을 싸야 했다. 오늘 이동하고 바로 내일부터 다시 집회가 계속된다.
세사르 목사 부자, 티후아나의 다니엘 목사, 사업가 마르코, 그리고 사울 목사, 공교롭게도 모두 목사님에게 수염을 깎인 사람들인데 그들은 떠나는 순간까지 작별의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목사님은 티후아나 집회를 준비할 다니엘 목사에게 무엇보다 집회는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다니엘 목사는 아주 숙연한 표정으로 다짐하듯 아멘으로 화답했다.
체뚜말(Chetumal)로 가는 길은 뜨거운 태양과 소나기, 모래바람을 번갈아가며 만나야 했다. 그러나 그 힘든 여정에도 주홍빛 후라보얌 나무의 아름다운 꽃들이 우리의 피로를 녹여주었다.
체뚜말은 낀따나로(Quintana Roo) 주의 수도로 인구 22만의 작은 도시다. 행정도시이다 보니 특별히 생산되는 산물이 없고 아직 도시개발이 미비하여 깜뻬체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열악해보였다. 그러나 도시가 면하고 있는 대서양의 옥색 바다를 비롯하여 자연환경은 남달랐다. 자연경관을 잘 개발하기만 하면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을 듯하였다.
체뚜말에 도착하자 칸쿤(Cancun)의 빠블로 목사, 소사 목사, 그리고 체뚜말 집회를 배설한 사무엘 목사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빠블로 목사는 지난 칸쿤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목사님을 자신의 교회로 초청하여 일일집회를 가진 적이 있다. 그 때 그 집회를 통해 그 교회가 성령으로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빠블로 목사는 그 집회를 계기로 교회가 두 배나 급성장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목사님께 사의를 표했다. 정말 모든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소식이었다.
목사님과 함께 한 시간들을 통해 교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국가가 변하는 역사는 곧 목사님과 함께 우리가 받을 상임을 믿기 때문이다.
도착 이튿날 아침, 주지사 공관으로부터 목사님을 초대한다는 전갈이 왔다. 낀따나로 주지사, 그리고 체뚜말 시장과의 오찬이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체뚜말 시의 아말리아 시장은 아주 신앙심이 깊어보였다.
목사님은 여자의 몸으로 시정을 이끌며 국가를 사랑하고 시의 발전을 위해 애쓰는 아말리아 시장을 높이 평가하셨다. 펠릭스 주지사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는 목사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는 자세였다. 나름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목사님이 늘 성공자들의 공통점으로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말씀하셨는데, 실질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말씀에 오차가 없음을 발견한다.
목사님은 지역발전을 위해 자문을 구하는 주지사와 시장에게 성경에 조명한 경영의 지혜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들은 오찬 시간 내내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펠릭스 주지사는 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사의를 표하고 한국의 영성세미나에 참석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또한 대통령을 꿈꾼다며 목사님께 기도를 받기도 했다. 아말리아 시장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이었다.(관련기사 4면)
아말리아 시장은 체뚜말 대학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목사님께 예정에 없던 세미나를 해달라고 갑자기 요청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에게 믿음과 도전을 주는 것이 시와 국가 발전에 중요하다는 것을 아말리아 시장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미래의 비전을 심어줄 귀한 시간을 내달라는 아말리아 시장의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충정에 감동을 받으셨다. 주지사 공관 오찬 일정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바로 체뚜말 대학생들이 모여 있는 홀리데이인 호텔 과테말라 홀로 향했다.
목사님은 체뚜말 대학의 젊은이들에게 세계로 시야를 넓혀 부지런히 배우고 익힐 것을 주문하셨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는 넓습니다. 이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선진국으로 유학을 많이 나가서 많이 보고 배우고, 그 배운 지식을 가지고 돌아와 이 나라 발전에 헌신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구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11:24)
대한민국이 전후 50여 년 만에 세계 10대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현재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외국 유학생 중에 단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제국의 문물과 앞선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고국으로 돌아와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
배우는데 무슨 자존심이 필요합니까? 내 나라, 내 민족, 내 가정이 살찌고 잘 사는 길이 있다면 무릎을 꿇고라도 배워야 합니다.”
강의가 계속될수록 젊은이들의 눈망울은 점점 커져갔다. 목사님은 두 학생에게 질문하셨다.
“돈이 많은 게 좋은가? 없는 게 좋은가?”
“많은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적당히 있으면 되지요.”
그들의 생각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그어놓고 넘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목사님은 세미나를 통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셨다. 더 큰 생각,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도전하는 젊은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미국에 대한 패배의식,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단에 서실 때마다 ‘미국의 하나님은 누구고 멕시코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다 같은 하나님 아닌가?’라고 말씀하시면, 멕시코 사람들은 크게 열광한다.
그들이 넘지 못할 벽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가능성의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이다.
체뚜말 대학의 한 교수는 질문을 통해 잘 사는 나라들이 갖고 있는 교육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그들의 교육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즉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하나의 답만을 강요하는 주입식 프로그램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마음껏 계발시켜주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자유로운 토론 학습 등을 통해 지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 앞서가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크게 깨닫는 모습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젊은이들과 교수들의 얼굴이 시작 때와는 달리 기쁨과 희망에 차 보였다. 세미나를 마치자 교수들과 학생들은 너도나도 목사님과 사진을 찍고 싶다며 모여들었다.
정말 이들이 오늘의 말씀을 깨달은 대로 실천하여 멕시코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간성(干城)으로 성장해가길 바란다.
체뚜말의 일기는 깜뻬체와 달리 우기(雨期)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집회장을 미리 가보니 집회장 전체를 천막으로 덮어놓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잘 되어 있었는데 그 천막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목사님은 사무엘 목사를 비롯한 집회 준비팀에게 절대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외집회를 계획했으면 날씨를 위해 기도했을 것 아닌가. 기도한 것은 받은 줄 믿어야 한다.’며 그들의 믿음 없음을 안타까워하셨지만, 백번 말하는 것보다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셨는지 천막을 걷으라는 주문은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인격의 하나님, 섬세한 하나님임을 절감했다. 집회가 계속된 3일 동안 첫날을 제외하고 비는 매일 내렸다.
그러나 집회 시간에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집회 시작 전에 폭우가 쏟아졌다. 천막 덕분에 음향장비가 물에 젖는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키워주는 동시에 그들이 들인 노력에도 점수를 주신 셈이다. 마치 ‘기도했으면 믿어야 한다. 그러나 너희들이 비에 맞을 성도들을 걱정하여 천막을 설치한 것도 이해한다.’하는 메시지 같았다.
첫날 집회에는 깜뻬체 집회를 능가할 만큼 더욱 귀신들이 떼를 지어 요동했다. 소리를 지르며 요동하는 귀신들이 드러나 연이어 단상을 끌어올려지는 성도들로 비명과 아우성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단상 위에는 귀신이 떠나간 후 누워있는 성도들로 가득했다. 특히 세 모녀에게 군대귀신이 들어가 심하게 요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린 막내 딸은 그로인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목사님은 이 군대귀신이 떠나면 어린 딸이 걷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 어미에게 들어가 심하게 요동케 하고 있는 군대귀신을 예수 이름으로 쫓아내셨다. 귀신이 떠나간 후 실신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던 세 모녀는 예수님 찬양을 하는 가운데 점점 의식을 되찾더니 나중에는 목사님과 함께 원을 그리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었다. 깜뻬체에 이어 체뚜말도 성령으로 뒤엎어지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