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서있는 자의 그림자는 똑바르다 ( 마 5:13~25 )
여주 예수중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광욱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한광욱 목사가 여주에서 교회를 시작했을 때 많은 난관에 봉착했답니다. 이유인즉 이단교회가 들어섰다는 악성루머 때문이었습니다. 기존 교회는 교회대로, 지역주민은 주민대로 확실한 이유도 모른 채 외면하고 애매한 돌을 던졌답니다.
그런데 한광욱 목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들이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한광욱 목사는 진심으로 그들의 일을 돕고, 어려운 자들의 힘이 되어 주고, 지역주민과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감에 따라 그들은 한 목사의 진실됨을, 성실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목사를 인정하게 되어, 이제 여주 예수중심교회는 그 지역에 없어서는 안 될 교회가 되었고, 한 목사는 그 지역의 유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답니다.
똑바로 서 있는 자의 그림자가 삐뚤어진 것을 못 봤습니다. 같은 의미의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구부러진 지팡이의 그림자는 휘어있다.’ 그림자는 행실에 따른 반응일 수 있고, 남이 내리는 평가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부러진 그림자가 신경 쓰여 그것만 펴보려고 합니다. 즉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이나 평가가 좋기를, 상향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서면 그림자는 자연히 똑바로 서있고, 지팡이를 똑바로 펴면 그림자도 따라 쭉 펴지게 됩니다.
내가 바르게, 옳게 행하면 반응과 평가는 절대 삐뚤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광욱 목사가 똑바로 서있으니 그림자도 똑바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똑바로 서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면 됩니다. 어두움을 내어 쫓을 수 있는 빛이 되고, 썩어져가는 곳에, 부패한 곳에 쳐지는 소금이 되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합니다.
첫째는 죄악과 이혼을 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죄악을 단호하게 잘라내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야 할 자들이 어둠 속에 거한다면, 어둠을 끼고 산다면 어찌 빛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썩어져 가는 곳에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먼저 썩어 있다면, 맛을 내야 할 소금이 맛을 잃었다면 결국은 길에 버려지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이반(離反)하는 것이요, 악은 자신과 타인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이반적인 행동입니다. 이 죄악을 물마시듯 하면서 그림자가 바르게 서길 원하십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사람에게 의롭게 행할 때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의 사람은 달라.”, “저 집사가 이곳에 온 후로 동네가 훤해졌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흥했고, 의(義)로 정돈되었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이 그랬고, 감옥이 그랬으며, 결국 애굽 전체가 그랬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전구에 검은 천을 둘러 씌워놓으면 빛이 차단됩니다. 소금이 아무리 짠 맛을 가지고 있더라도 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죄악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다면, 죄악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영원히 당신의 그림자는 삐뚤어져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한광욱 목사를 언급했는데, 만일 그가 주민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동네 주민들에게 못 들을 소리 듣고, 안 당해도 될 일을 당했지만 그는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용서했기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려면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를 용서해주는 경지를 넘어 왼 뺨까지 돌려대라고 하시고, 속옷을 빼앗는 자에게 겉옷도 주는 그런 마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작금에 일어난 어느 재벌 총수의 보복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아들이 맞고 들어오면 부모는 당연히 속상하고 화납니다. 그러나 그가 대범하게 생각하고 용서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고,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억울한 소리 많이 듣고, 애매한 핍박을 많이 받은 자가 있다면 접니다. 입에도 담기조차 싫은 소리들, 생각하고 싶지도 않는 고난들이 제게 너무 많았습니다. 정말 성질 같아서는 맞받아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준 주인처럼 주님이 저의 많은 죄를 탕감해주셨기에 까짓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같은 그들을 용서해주자 싶어 악물고 참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때가 되매 그들 위에 높이시고, 내 잔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마6:14).
왜 용서를 못하는 줄 압니까? 소금이 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덩어리 채 있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녹아야 소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어떻게 해야 녹습니까? 물이 있어야 녹습니다. 곧 우리가 소금의 기능을 다하려면 성령에 녹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소금이 녹으면 불순물도 제거할 수 있고, 맛도 내고, 뻣뻣한 배추도 절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힘으로 안 되는 용서를 성령의 능력으로 하세요. 당신에게 성령의 열매인 용서의 마음이 있다면 당신의 그림자는 절대 비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항상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기쁜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이야 당연지사지요. ‘항상’ 이란 말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힘들 때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왕 당한 일이니 적응하고 기쁨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이끈 나치 독일이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사건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 때 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젊은 유태인이 가스실로 가는 중에도 기쁨으로 찬송을 했습니다. 가스실 앞에서 독일군이 이 청년을 보고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아니, 너는 죽으러 가는 데도 찬송이 나오냐? 너는 좀 더 고통을 당한 후에 죽어야 돼. 뒤로 돌아가.” 그래서 가스실로 들어가는 일이 미뤄지다가 독일군이 패망하여 자유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다니엘이,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가, 그리고 바울이 핍박 중에도 고통 중에도 기뻐했을까요? 이는 참 소망 되신 하나님이 늘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안에 떨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까닭입니다. 늘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않는다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나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전도인의 삶을 사는 자의 그림자는 삐뚤어지지 않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 전도인의 삶을 사는 자는 늘 깨어 있으니 그의 그림자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직함이 행동을 다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직함을 가지고 우리의 언행심사를 깨끗하고 의롭게 행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림자도 바르게 형성될 것입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할렐루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길을 모르는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되려면 죄악과 이혼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