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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 ( 요 5:28,29 )

372호 · 2007-04-11

저는 이 씨(氏)문중의 장손이며, 우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제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던 분입니다. 제가 태어나보니 그런 가문과 집안이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이 씨 문중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제가 자원해서 장남으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제가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선택해서 그의 자녀로 난 것이 아니라 제가 태어나보니 이런 것들이 다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출생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선택해서 출생할 수 있었다면 아무도 아프리카 같은 척박한 나라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도 가난한 집에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들 왕실에서, 재벌가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것이었으니 함구(緘口)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상에서 태어날 때는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다음 세상이냐고요?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존체입니다. 물론 수한이 차면 육은 벗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다시는 죽지 않는 자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만 부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활을 얻느냐가 관건이지 믿지 않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부활이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말씀이 다니엘서 12장에 있습니다. “땅의 띠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 ‘땅의 티끌’이란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영생을 얻는 자’는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신앙인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은 이 땅에서 불신앙의 삶을 산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나 믿지 않은 자들이나 동일하게 부활하는데, 그 결과가 둘로 나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시 종합해보면 모든 사람이 주님 재림의 날에 부활하여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그 때 어떤 이는 ‘영생을 얻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수욕을 받아 영원히 부끄러운 심판의 부활’을 언도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 행위를 따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다음 세상에 어떤 곳에 사느냐, 어떤 위치에 사느냐가 자기 행위에 따른 것이라고 하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는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당신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중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물론 생명의 부활, 영생의 부활을 택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를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길이요, 그분만이 진리이며, 그분만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요14:6).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길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죄를 인격화하면 마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악한 마귀는 우리를 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쏨으로 우리를 죽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가슴에 사과를 하나 매달아놓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사과를 향해 화살을 쏘면 우리가 사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화살이 사과를 명중하면 결국 우리도 그 화살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 그 나라는 죄가 있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죄악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죄의 덫에 한 번 물리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죄악의 길에 가지 않는 것이 최상이요, 만일 죄의 덫에 발이 걸렸다면 그 발을 잘라내고라도 거기서 빠져나와야 영생의 부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9). 지금 그 덫에서 나오지 않으면 나중에 심판의 부활을 맞게 될 것입니다(롬1:18~32). 그러므로 매일 두루마기를 빠십시오. 매일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돼지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 죄를 회개하고 다시 그 죄를 짓는 것은 안 됩니다. 회개란 죄에서 180도 돌아서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지시하신 짐을 지는 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두 다 이루시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놓이게 하셨고,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으며, 우리를 치유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사53:5,6).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주신 것을 누리고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오늘날의 유럽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럽 교회는 이제 관광명소로 전락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유럽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유럽 교회가 왜 저런 모습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복음 전파의 짐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후대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위한 짐을 지는 것입니다. 나가서 전하고, 주를 위해 헌신하며, 물질을 드리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주를 위해 짐을 지는 것입니다. 짐을 많이 진 자는 많은 영광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진 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겁고 힘든 짐을 서로 지려고 하는 걸까요? 애국심에 불타서요? 아닙니다. 그만큼 영광도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짐을 지는 것은 세상이 보기에 참으로 미련하게 보여도 나중에 큰 영광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쁨으로 짐을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15:19). 제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단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집회를 다니는 것은 그 날의 상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때론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날의 왕권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지라 오늘도 내일도 쉼 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거기서 영생의 부활을 얻을 것이냐, 영멸의 부활을 얻을 것이냐는 오늘 당신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생사화복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잠시 육신의 안일과 영달을 꾀하다가 영멸을 맞겠습니까? 아니면 세상과 죄를 멀리하며, 조금은 힘들더라도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위한 짐을 지고 가다가 궁창의 빛과 별 같은 영광을 취하시겠습니까? 선택하십시오.

저는 당신이 최고의 부활, 곧 영생의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날,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과 상을 얻고, 더는 한 고을, 다섯 고을, 열 고을의 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생사화복이 나에게 있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꽃을 찾는 나비인생이 될 것인가 불에 죽는 나방인생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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