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마10:28~31)
외국 집회를 다니다보면 정말 인간의 생각으로는 두렵고 황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집회를 방해하는 자들의 협박과 공갈이 도를 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회를 배설하려던 자들이 두려워 집회를 취소하고, 제게 등을 돌리는 경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이 악한 마귀의 궤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궤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까? 악한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기 위함이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권세를 그대로 이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는데 왜 마귀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담대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저도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두려운 것은 제가 나태하고 현실에 안주하여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을 섭섭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고, 제가 겁나는 것은 제가 혹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제 뜻대로 가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게 두려움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그 분,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며, 영원히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그 분,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는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이 무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공의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다윗이 충신 우리아의 처, 밧세바를 취하고 난 뒤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는 침상이 적시도록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가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정결케 하시고, 저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잘못으로 인하여 왕 자리에서 쫓겨날까봐 겁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떠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자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도망했을 때도 다윗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삼상24:6,7)
요셉을 볼까요? 요셉이 종 된 몸으로 이국땅에서 충성하고 노력하여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 가정의 총무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준수한 용모에 빠져 그를 유혹합니다. 그 때 요셉이 뭐라 했습니까? “당신 남편 보디발이 알면 나는 죽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사실을 당신 남편이 알면 내가 여태껏 한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니 이러지 마세요.”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더하사 그를 애굽의 총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은 몰랐을 수 있었으나 적어도 그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내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군중이 두려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씻지 못할 죄인이 되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영원히 지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그는 지금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불이 나가면 어두워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어두움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불이 나간 사실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어두움의 주관자인 악한 것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빛 되신 예수가 떠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빛이 없으니 무서운 것입니다. 요나 앞에 불어 닥친 풍랑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요나가 거역하고 돌아선 하나님이 두렵다는 것이지요. 제 말을 이해하신다면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소멸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내가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 영혼이 황폐화 되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신앙을 합리화하고, 세속화하고, 형식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누구입니까?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까? 고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즉 빛이 들어오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사모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사실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어겨가며 그 자리에 함께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어떤 것인 줄 아십니까? 죄 중에도 중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고도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성령을 받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나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비자의 말에도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또 칼에 목이 잘린 사도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선친들이 담대히 순교의 길을 간 것도 성령의 충만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것들은 그들의 몸을 죽이기는 했지만 영혼까지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충만함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북한의 핵문제로 우리 국민들이 두려워하고 뒤숭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북한의 핵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악한 것들의 장난에 불과합니다. 핵이 육은 죽일 수 있습니다만 영혼은 손대지 못하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버리실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까 하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소돔과 고모라 같이 타락한 세태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이 부탁하신 일을 잘 이행하지 못한 것을, 우리 하나하나가 성령을 소멸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긍휼히 여기기만 하시면 핵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위협한다 해도 겁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금에 일어난 상황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절대 어두움이 빛을 주관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하나님 앞에 바로 섭시다. 악한 마귀의 작태와 궤계를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워하여 그 분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삽시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장애물이 없어질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떠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나 영원히 참지 않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