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고전10:19~33)
한 여자 집사님이 엉엉 울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집사님의 얼굴을 보니 눈은 시퍼렇게 멍들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집사님,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하고 제가 놀라 물었더니, 그 집사님이 “이번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너는 조상도 없냐?’면서 마구 때렸어요.”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에게 “집사님, 집사님이 당하신 일은 하늘에 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잘 하신 겁니다. 아프시겠지만 분명히 하나님께 집사님의 이름이 기억되었을 겁니다.”라고 위로를 했습니다.
저도 예수를 믿고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가문의 종손이고, 칠남매의 장남인 제가 예수를 알고 난 후, 절대 제사는 지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은 다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닐 뿐더러 더욱이 예수를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은 귀신인 고로 우리와 원수다.’라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 때 가장 섭섭해 하고 황당해 하신 분이 제 어머니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이 귀신이 되었다는 말씀에 분개했고, 제게 ‘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냐?’며 대성통곡하셨습니다. 지금 대전교회 담임으로 있는 이역사 목사가 제 막냇동생인데, 그 때는 예수를 믿지 않은 때라 어머니의 통곡을 보고는 제게 달려들어 옆구리를 발로 차며, 제사상을 엎어버렸습니다. 왜 저라고 어머니가 그토록 통곡을 하시는데,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 않았겠습니까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제사상에 절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명절이면 저는 꼭 ‘신앙에 타협은 없다’고 설교합니다. 아마 귀에 못이 박혔을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강력하게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느냐 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 때문입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분명히 우리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성경은 귀신에게 한다는 겁니다. 곧 믿지 않고 죽은 자가 귀신이 된다는 겁니다. 믿지 않고 죽었으면 할아버지든, 아버지든 다 귀신이라는 겁니다. 귀신이 누구입니까? 마귀의 졸개들 아닙니까? 마귀는 하나님과 원수이고요. 그러니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절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2).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제사에는 참석하지 않지만 음식 장만은 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나 제 대답은 좀 강경한 편입니다.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것도, 제사 지내라고 돈을 내는 것도 안 됩니다. 도둑놈들이 남의 집을 털 때 망을 보는 자나, 담을 넘는 자나, 장물을 내다 파는 자나 다 같은 도적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자나 제사음식을 만드는 자나 제사상에 돈을 대는 자나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지도 말고, 명절인데 부모님 용돈도 드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임에 쓰는 돈을 구별하여 드리고, 음식도 구분해서 만들면 됩니다.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오직 외길입니다. 그 정해진 길 외에 다른 길로 가면 그것은 곧 삼천포로 빠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삼십일 동안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이든 구하면 사자굴에 넣는다.’는 금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삼십일 동안이니 그동안만 속으로 기도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양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앞서 가서 사자의 입을 봉하셨던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느브갓네살이 만든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풀무불에 들어가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들을 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만일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선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쪽 같은 믿음입니까?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탄복하셨고, 주의 천사들을 급파하사 풀무불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제사로 인하여 당하는 핍박이 절대 약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자굴에 던져지는 그 이상은 아닐 것 아닙니까? 풀무불에 당신을 던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이 명절에 당신이 이들의 믿음을 본받아 신앙의 절개를 지킨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분명히 위경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탤런트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극중에서라도 제사상에 절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영화나 극을 시작할 때면 고사지내는 것이 상례라는 말에 저는 그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난감해하며, “극중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저는 극중의 인물을 연기할 뿐인데요.” 라고 말하며 여지를 기대했지만 제 대답은 역시 ‘No’ 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제사를 안 지내니 그런 염려는 없어.’ 하고 안위하고 있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절한다는 것이 꼭 제사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당신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면 재물이 당신의 우상이며, 아내나 남편을, 그리고 자녀를 더 사랑하면 그것이 당신의 우상인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 1계명이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입니다. 하나님은 시기하시는 분이시며,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 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6:14,15).
왜 하나님이 질투하시느냐 하면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더 진한 관심을 보이면 질투하고 시기하고 마음이 편치 않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당신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분의 일을 먼저 챙깁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 속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우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0순위’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절대 취미 생활하듯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영적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는 죽느냐 죽이느냐 밖에 없듯, 신앙생활도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대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길은 좁은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그러나 좁은 길은 절대 불편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헤맬 필요도, 갈등할 필요도 없는 평안한 길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사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니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이겨내야 합니다. 신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할렐루야!
미지근한 물에 대장균이 있듯 미지근한 신앙에 마귀가 있다
망 보는 자나 담 넘는 자나 동일한 도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