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위에 은혜를 입은 자들 (고전15:1-10)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 한 이래로 한 번도 시험에 들어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도 주님을 원망해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뭐 워낙 있는 집에서 태어났고, 목회도 돈 가지고 시작했으니 무슨 고생을 했겠어? 그러니 시험은 무슨 시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 목회 길이 그리 순탄했습니까? 늘 말하듯 저는 물 없는 사막의 길을 걸었고, 눈 덮인 산야를 걸어왔습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심한 아픔과 고통의 터널 속을 지나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 제가 시험에 들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은 것은 주님께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전부터 저를 예정 가운데 두시고 택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도 은혜요 분에 넘치는 감사인데, 더구나 부족하기만 한 저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시고 능력을 입히사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삼아주셨으니 이것은 은혜 위에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불평이 어디 나오겠으며, 어찌 시험에 들겠습니까?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은혜가 무엇입니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아닙니까?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주 앞에 할 말을 잃은 자들입니다. 영멸에서 영생으로 이끌어내신 것 하나만으로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강물을 먹물 삼아 기록한대도 부족할 만큼 넘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은혜를 더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주의 일을 하는 것, 복음전도의 열망, 사역, 경건의 능력을 입은 것은 이미 받은 은혜에 다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은혜의 옷을 덧입지 않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주의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고, 또 돌을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내가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내가 이처럼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자신이 훌륭한 사도이자 전도자가 된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받은 은혜가 사무쳤기에 사도바울은 핍박을 넘어 순교의 자리까지도 감사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여 심부름을 시키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학생들 중에 저를 불러주신 것이 자랑스러워 어깨가 으쓱했었습니다. 그래서 심부름이 고되어도 기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저를 기억하시고 부르셔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성악가도 많은데 목소리도 시원찮은 나를 성가대로 세우시고,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도 많은데 볼품없는 내게 안내를 맡겨주시고, 더는 똑똑하고 바른 사람도 많은데 지혜롭지 않는 나를 주의 길로 불려주신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야 말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948년 여수순천반란 사건 때에 좌파세력에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예수를 부인해야만 살려준다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들의 장례식장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3남 3녀를 주시고,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장자와 차자를 하나님께 바치게 되는 복을 주심을 더욱 감사드립니다. 우리 집 안에서 순교자가 두 명이나 나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자의 반열에 자신의 아들들이 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는 받은바 은혜가 무엇인지, 장차 받을 바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일을 한 것은 절대 불타서 없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더 큰 은혜로 반드시 보상됩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3:13,14). 은혜로 말미암아 한 일인데 더 큰 은혜, 상과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니…
우리 교회는 정말 은혜 위에 은혜를 입은 교회입니다. 교회 없이 가는 것이 은혜요, 늘 성령이 충만한 것이 더 큰 은혜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큰 능력을 나타내 핍박을 받게 하심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주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사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행위를 해서 포상으로 출애굽 시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종 되었던 곳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 은혜를 심비에 새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까?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그들은 광야에 들어서자 ‘언제 우리가 애굽에서 벗어나고자 했느냐?’고 모세에게 항의했습니다.
이는 곧 출애굽을 결정하신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합당한 것은 회초리뿐인지라 하나님은 1주일이면 들어갈 가나안을 40년 동안 배회하게 하셨습니다. 괘씸죄인 것입니다. 괘씸죄하면 사울이 생각납니다. 그는 다윗에게 신세를 많이 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되레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괘씸죄의 결과는 그와 그의 자녀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은혜를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를 살려준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자 간신히 살아남아 숨어사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우대해 줍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성에 들어올 때 나가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의 아내 미갈이 비웃자 그는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삼하6:21,22).
다윗은 목동에 불과했던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고, 그 은혜에 감사했기에 왕으로서의 체통 따위는 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혹 하나님 때문에 고통과 핍박, 환난을 당한대도 감사함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고난 중에서도 그 은혜를 되새기며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을 자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은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내게 맡겨진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서로 사랑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나라를 전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우리에게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은혜를 잊지 말라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