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한 가정의 지주였던 노인의 죽음으로 집안이 침울한 가운데 장례절차가 속속 진행되고 있었다. 올 아흔을 바라보던 노인은 참 다복한 사람이었다. 아들 다섯과 딸 둘을 훌륭하게 키워 다 출가시켰으니, 손자손녀를 포함하면 번성한 가문의 가장이었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 충분히 대접을 받았으며, 꽤나 많은 재산을 소유한 동네 유지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장례에는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이제 세상의 마지막 옷이라는 수의를 입히고 입관하기 위해 온 가족이 싸늘한 노인의 시신 곁에 모여들었다. 온 가족이 곡(哭)을 하는 가운데 입관절차가 마쳐졌을 때, 고인의 손자중의 하나가 툭 한 마디 던졌다.
“할아버지 옷에는 주머니가 없네.”
어린 손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고인은 평생 일구고 가꾼 것 중 하나도 챙겨가지 못하셨다.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도 누구 하나 같이 가주는 자 없고, 그동안 모아왔던 재산도 다 놓고 가고, 덕망 역시 다 놓고 빈손으로 가셨다.
모든 장례절차를 마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다들 지치고 허탈함 때문에 말이 없었다. 그 때 둘째 아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정막을 깼다.
“인생이란 것이 뭘까?”
‘하숙생’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객지에서 임시로 거처하는 하숙집 같은 것이 이 땅이다. 하숙 생활이 끝나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처럼,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떠나야 하는 하숙 생활인 것이다.
인생에 작별을 고할 때 잔뜩 손에 들고 가는 자를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애지중지 했던 것들도, 목숨보다 귀한 것들이라도 다 놓고 간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랬고,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손가락에 반지 하나 끼고 가지 않으셨다. 하숙 생활 할 때의 물품을 버리고 가듯 다 놓고 가셨다.
그런데 그렇게 다 놓을 것들을 위해서 우리는 평생을 산다. 그것을 위해 투쟁하고, 아등바등하며, 안절부절못하고, 그것에 혈안이 되어 일생을 산다. 곧 놓고 갈 것을 위해서. 이 얼마나 부질없는 인생이던가!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손도 펴고 가는 마당에 무슨 주머니겠는가!
우리 믿는 자들도 이 세상을 작별할 때 주머니 없는 수의를 입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나 동일한 죽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우리는 주를 위해 봉사했던 일들, 헌신한 일들, 그리고 주님 때문에 당한 핍박과 모함 등의 흔적들이 이미 주의 나라에 기록되어 있다. 다 전산처리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의미 자체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다.
그 날 주 앞에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나라에 입성할 때 당당할 수 있다. 이민을 가도 투자이민이 대접을 받지 않던가.
인생은 일생(一生)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귀한 세월을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언젠가는 다 놓고 갈 것을 위해 살 것인가? 곧 다 버리고 갈 것을 위해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가?
주를 위해 살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자. 하늘나라 확장사업에 뛰어들자. 그러면 주님이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시고, 그 날 그 나라에서도 대접하실 것이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