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그릇이 금그릇 될 수 없다 (롬9:20, 21)
목회 초기 때의 일입니다.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말씀을 선포한 후에 피아노를 치며 감미롭게 찬송을 했는데 얼마나 멋있고 은혜로운지 제가 그만 홀딱 반했습니다. “그래, 나도 피아노를 배워서 저렇게 목회를 해야지.” 하고는 바로 피아노 학원을 찾아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초석아, 그 사람은 피아노 치며 간증하는 사람이고 너는 외치며 능력으로 일할 자야! 남의 것 부러워하지 말고 네 것이나 키워라!” 이 말씀이 오늘의 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저는 세계적인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보며 설교도 따라 해보고, 제스처도 흉내 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제게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기만 했습니다. 그 때 다시 성령께서 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만들 때는 너만의 것으로 만들었단다. 네 것을 찾아야지 왜 남의 것을 흉내 내려고 하느냐?” 그제야 제가 깨닫고 제 색깔, 제 스타일의 목회 방침을 찾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취미 삼아 도자기를 만들러 이천에 자주 다녔습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면 저는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고 거기에 알맞게 흙덩이를 떼고, 쓰임새에 맞게 모양새를 만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다 계획하고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초석은 전세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만들어야지.’ 이렇게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셨고, 예정 가운데 두사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땅에 보내시고 그릇대로, 모양대로, 계획하신 대로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더는 탐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불평이 나오고, 시기질투를 하게 되며,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의 그릇을 넘겨다보았습니다. 넘겨다보니 자기에게는 없는 용맹성이 다윗에게는 있는 겁니다.
다윗의 용맹스러움이 부러운 판에, 백성들이 다윗에게 찬사를 보내자 시기심이 발동했고, 그것이 과해지니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주시하던 토기장이는 그런 토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그것을 깨뜨려버렸습니다. 토기를 깨뜨리고 안 깨뜨리고는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있으니까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자기 지은 바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만드신 이,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45:9).
교회 안에서도 보면 자기 그릇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데나 불쑥 나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이는 자기 그릇대로 충성하고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다 사도면 누가 가르치고, 다 교사면 배우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품을 조립하는 자가 있고, 판매를 하는 자도 있고, 관리하는 자도 있으며, 경영을 담당하는 자도 있고, 경영진을 도와 비서일을 하는 자도 있어야 회사가 운영이 됩니다. 그런데 기계조립은 어렵고 힘드니 다 경영을 하겠다고 하면 회사가 제대로 운영이 되겠습니까? 자기에 맞는 일이 다 있습니다. 그것을 천직(天職)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 손이면 어떻게 걸어 다니고, 다 눈이면 밥은 어디로 먹는단 말입니까?
왜 남의 것이 부러워 보이는 줄 압니까? 왜 자기 자신으로 인해 갈등하는 줄 압니까?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그릇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개와 닭이 살았습니다. 개는 매일 밤 주인집을 지키느라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닭은 푹 자다 동틀 무렵에나 일어나 ‘꼬끼오’ 하고 한 번 우는데, 주인은 늘 닭에게만 고맙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는 은근히 화가 나고, 칭찬받는 닭이 부러워 하루는 동이 트기가 무섭게 지붕 위로 올라가 ‘멍~’ 하고 짖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저 개가 돌았나?’ 하고는 하인들에게 미친개를 없애라고 해서 그 날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그릇이 무엇인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라고 했을 때 갈등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고 말씀하심으로, 모세의 존재와 만드신 목적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모세가 묻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이런 사명을 부여한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설명하심으로 모세가 갈등하지 않게,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게 되면서 이방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신앙관도, 국가관도, 인생관도 흔들리게 되어 있고, 결국 모든 면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고래라도 물을 떠나는 순간에 날벌레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침이 우리 몸에 유익한 것이지만, 침이 입 밖에 나오면 더럽고 추잡한 것이 되고 말지 않습니까? 즉 자기 자리, 자기 직분, 자기 직업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필 나는 이렇게 작은 간장종지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큰 항아리는 장독대에 있어 어쩌다 주인의 손길을 타지만 간장종지야 매일 주인 밥상에 오를 수 있으니 큰 항아리만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왜 하필 나는 발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손이 좋아 보이지만 손의 일은 너무 많습니다. 발이야 걸어 다니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다 쓰임새에 맞게, 다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귀히 쓸 권도, 천히 쓸 권도 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만드신 대로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릇이 더러워지지 않게, 그릇에 금이 가지 않게 잘 살피고 잘 씻어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면 됩니다. 금 그릇이면 어떻고, 나무 그릇이면 어떻습니까? 다 주인의 그릇이고, 다 주인이 쓰시는 그릇인데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할렐루야!목회 초기 때의 일입니다.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말씀을 선포한 후에 피아노를 치며 감미롭게 찬송을 했는데 얼마나 멋있고 은혜로운지 제가 그만 홀딱 반했습니다. “그래, 나도 피아노를 배워서 저렇게 목회를 해야지.” 하고는 바로 피아노 학원을 찾아 등록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초석아, 그 사람은 피아노 치며 간증하는 사람이고 너는 외치며 능력으로 일할 자야! 남의 것 부러워하지 말고 네 것이나 키워라!” 이 말씀이 오늘의 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저는 세계적인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보며 설교도 따라 해보고, 제스처도 흉내 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제게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기만 했습니다. 그 때 다시 성령께서 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만들 때는 너만의 것으로 만들었단다. 네 것을 찾아야지 왜 남의 것을 흉내 내려고 하느냐?” 그제야 제가 깨닫고 제 색깔, 제 스타일의 목회 방침을 찾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취미 삼아 도자기를 만들러 이천에 자주 다녔습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면 저는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고 거기에 알맞게 흙덩이를 떼고, 쓰임새에 맞게 모양새를 만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다 계획하고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초석은 전세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만들어야지.’ 이렇게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셨고, 예정 가운데 두사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땅에 보내시고 그릇대로, 모양대로, 계획하신 대로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더는 탐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불평이 나오고, 시기질투를 하게 되며,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의 그릇을 넘겨다보았습니다. 넘겨다보니 자기에게는 없는 용맹성이 다윗에게는 있는 겁니다. 다윗의 용맹스러움이 부러운 판에, 백성들이 다윗에게 찬사를 보내자 시기심이 발동했고, 그것이 과해지니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주시하던 토기장이는 그런 토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그것을 깨뜨려버렸습니다. 토기를 깨뜨리고 안 깨뜨리고는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있으니까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자기 지은 바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만드신 이,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45:9).
교회 안에서도 보면 자기 그릇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데나 불쑥 나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전12:29,30). 이는 자기 그릇대로 충성하고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다 사도면 누가 가르치고, 다 교사면 배우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품을 조립하는 자가 있고, 판매를 하는 자도 있고, 관리하는 자도 있으며, 경영을 담당하는 자도 있고, 경영진을 도와 비서일을 하는 자도 있어야 회사가 운영이 됩니다. 그런데 기계조립은 어렵고 힘드니 다 경영을 하겠다고 하면 회사가 제대로 운영이 되겠습니까? 자기에 맞는 일이 다 있습니다. 그것을 천직(天職)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 손이면 어떻게 걸어 다니고, 다 눈이면 밥은 어디로 먹는단 말입니까?
왜 남의 것이 부러워 보이는 줄 압니까? 왜 자기 자신으로 인해 갈등하는 줄 압니까?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그릇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개와 닭이 살았습니다. 개는 매일 밤 주인집을 지키느라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닭은 푹 자다 동틀 무렵에나 일어나 ‘꼬끼오’ 하고 한 번 우는데, 주인은 늘 닭에게만 고맙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는 은근히 화가 나고, 칭찬받는 닭이 부러워 하루는 동이 트기가 무섭게 지붕 위로 올라가 ‘멍~’ 하고 짖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저 개가 돌았나?’ 하고는 하인들에게 미친개를 없애라고 해서 그 날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그릇이 무엇인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라고 했을 때 갈등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고 말씀하심으로, 모세의 존재와 만드신 목적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다시 모세가 묻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이런 사명을 부여한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설명하심으로 모세가 갈등하지 않게,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게 되면서 이방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신앙관도, 국가관도, 인생관도 흔들리게 되어 있고, 결국 모든 면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큰 고래라도 물을 떠나는 순간에 날벌레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침이 우리 몸에 유익한 것이지만, 침이 입 밖에 나오면 더럽고 추잡한 것이 되고 말지 않습니까? 즉 자기 자리, 자기 직분, 자기 직업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필 나는 이렇게 작은 간장종지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큰 항아리는 장독대에 있어 어쩌다 주인의 손길을 타지만 간장종지야 매일 주인 밥상에 오를 수 있으니 큰 항아리만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왜 하필 나는 발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손이 좋아 보이지만 손의 일은 너무 많습니다. 발이야 걸어 다니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다 쓰임새에 맞게, 다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귀히 쓸 권도, 천히 쓸 권도 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만드신 대로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릇이 더러워지지 않게, 그릇에 금이 가지 않게 잘 살피고 잘 씻어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면 됩니다. 금 그릇이면 어떻고, 나무 그릇이면 어떻습니까? 다 주인의 그릇이고, 다 주인이 쓰시는 그릇인데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할렐루야!
하나님은 절대로 불량품을 만들지 않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