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요11:16~46)
저는 집회에 나가서 별다른 것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 분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리고, 그 증거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칩니다. 그런데 이번 시베리아에서처럼 왜들 협박과 공갈을 하며 제가 하는 집회를 방해하는 줄 압니까? 제가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은 2천 년 전 예수님이나 하신 일인데, 왜 네가 하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단이라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잘못되었다면 성경에 있는 말씀은 다 거짓이니 다 찢어버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는 말씀도 거짓이니 삭제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는 말씀 역시 거짓이니 지워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변함도 없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장차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하나님만을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그릇된 신앙입니다. 그런 그들은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면 기복신앙이라고, 성숙치 못한 신앙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도 잘못된 것입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현실이 유기적인 관계가 될 때 참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시지도 않고, 지금 휴업(休業)중이시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이 늦게 당도하시자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텐데요.” 그러자 주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마르다의 답변은 과거의 주님,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은 인정했지만 현재의 주님은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주님, 우리 오라비는 이미 죽었습니다. 슬프지만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마르다를 향하여 질타하십니다.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부활만을 믿지 말고, 이 부활이 네 삶 속에서 현실로 일어남을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시키시려고 많은 무리 앞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려 하심입니다. 오늘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자들의 삶 속에 복된 소식을 전하려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냥 이생은 어쩔 수 없으니 꾹 참고 있다가 천국에나 와라. 거기서 이생에서 누리지 못한 것을 누려라’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잘살고, 지금 병 낫고, 지금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 직접적으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십니다.
한 목사님이 빈민촌에 전도를 하러 갔답니다. 그런데 한 집에 들어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예수 믿으세요.” 했더니만 그 집 주인이 그러더랍니다. “아니, 지금 사는 게 지옥인데 나중에 천국가면 뭐하겠소?” 그 때 그 목사님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생의 축복’이었답니다. ‘그래,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도 잘 된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알리지 못했구나.’ 하고는 그 후로 예수를 믿으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진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전했더니 교회가 창대해졌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믿음은 현재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진행형(~ing)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데 우리 삶속에 그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계약파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처음 계약조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약을 지키면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와 공모하여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계약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고, 해산의 고통과 수고를 더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계약하시고, 모세의 율법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하시며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오시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다시 계약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이 주된 계약이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됨은 물론 천국까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계약을 져버리고 다른 길로 행하니 주님이 계약이행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 방치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역사하셨으나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열국의 노예로 넘기시고 잠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안 되어서 묵묵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계약 파기에 따른 당연한 보응인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이것도 또 하나의 계약조건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귀신을 내쫓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기에 “귀신 쫓는 것은 주님이나 하시는 일이라니까. 저건 다 가짜야.” 이러는 겁니다. 제가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계약이 그런대 제가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 명실상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교회라고 자부합니다. 저와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침표 없는 사도행전을 계속 써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면 됩니다. 가난하던 내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하게 되는 것, 병들었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음을 입는 것, 실패만 하던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성공에 이르는 것,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가시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위해 일하는 것은 그 날에 상과 면류관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천국생활을 해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전도해 보세요. “너나 잘 살아라.” 그럴 것 아닙니까? 병들어서 시름시름하며 예수 믿으라고 전해보십시오. “예수가 있으면 네 병이나 나아라.”하고 반격이 들어올 것 아닙니까?
현재(present)는 곧 선물(presents)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선물을 주시고자 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기도의 부족은 모든 것의 부족이다
계약을 이행할 것인가 아니면 파기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