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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담대한 자가 성공한다 (수1:1~9)

329호 · 2006-06-14

1971년 9월,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사에 정주영 현대회장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갈색머리 신사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는 A&P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이었습니다. 정 회장은 롱바톰 회장에게 “조선소를 지을 돈이 필요하다. 버클레이즈 은행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현 상황에서 한국의 회사가 조선 사업을 한다면 누가 선박을 사줄 것이며, 돈을 갚을 능력과 잠재력을 누가 인정하겠느냐? 조선 사업을 한다는 것은 당신 환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였습니다. 그는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가 1800대부터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쳤소.

다만 쇄국정책으로 인해 산업화가 늦어졌지만 우리는 조선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소.”라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롱바톰 회장은 버클레이즈 은행에 추천서를 써 주어 차관도입에 숨통을 틔게 해주었고, 그것이 밑받침이 되어 현대조선소가 기공되었던 것입니다. 정 회장이 롱바톰 회장의 냉대에 주눅이 들었더라면 그는 차관도입에 실패했을 것이고, ‘현대조선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롱바톰 회장은 그 후 정 회장의 첫 인상에 대해 “그는 굉장히 강하고 담대한 인간이었고,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기에 향후 사업 동반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술회했습니다.

세계사나 교회사를 쓴 주인공들은 이처럼 담대한 자들이었습니다. 담대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담력입니다. 담력(膽力)이란 곧 마음의 힘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마음을 지키는 힘 말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먼저는 자신에게 담대해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처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를 책망했을 때 다윗은 바로 이실직고하고는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이처럼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 사과하는 것이 자신에 대해 담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에게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말렉을 쳐부수고 거기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양과 소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자 그는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삼상15:20,21) 자신에게조차 담대하지 못한 자에게 왕권은 어울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왕관을 벗겨 다윗의 머리에 씌우셨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것은 아담이 하와와 더불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변명한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핑계대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아뢰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TV로 청문회를 보면 완전히 코미디 아닙니까? 삼척동자도 다 알 일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눈에 보이는 거짓말로 변명하는 것을 보면 저런 자가 한 때 이 나라의 정계나 경재계를 휩쓸었다는 것이 창피하지 않습니까?

둘째는 강한 자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어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무모하리만큼 상대가 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은 담대함이 무엇이며, 담대함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다윗은 달려 나가 물맷돌을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켜 거인을 넘어뜨렸습니다. 이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윗은 비록 어렸지만 담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 담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믿는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를 철저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는 곳이 있으면 담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담대합니다.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딴 자 앞이라도, 재력이 막강한 자 앞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것은 지력의 원천이시며 재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빌립집사가 에디오피아의 큰 권세를 가진 내시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도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셋째, 어려운 상황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에스더가 하만의 궤계로 인해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풍전등화의 상황이 되었을 때 금식하고 어전에 나아갑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역사하사 왕의 마음을 여셨고, 결국 위경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고 하만을 멸하는 역전 드라마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심경은 담대함의 극한 대변입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섭겠습니까? 저는 집회를 하면서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많이 봉착했었고, 무수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집회 도중에 전기를 끊어버린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담당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기를 끊는 것은 좋다. 그러나 불은 들어오게 해라.” 그랬더니 그는 꼼짝 못하고 전기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제게 그런 협박이 통하리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지요.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담대해야 합니다. 갈릴리에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당황할 때 주무시던 주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기업이나 가정에 풍랑이 일 때 두려워말고 정면 돌파를 하십시오. 두려워하면 풍랑이 배를 덮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이 들린 딸을 고치고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라고 홀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담대하게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웬만한 여인이면 치욕스런 말에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을 텐데 그녀는 예수 앞에 담대했습니다. 그래서 딸을 고쳤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소식이 없자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에 분노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진멸하면 애굽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이려고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출32). 얼마나 담대합니까? 세례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 의해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침노합니까? 담대한 자입니다.

제가 왜 담대함을 누차 말하는 줄 압니까? 두려워하는 순간 전기의 전원이 꺼져버린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두려워하면 보이던 길도 안 보이고, 들리던 것도 안 들리고, 상상의 전원이 나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올무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을 두려워하면 접시 물에도 빠져죽는 법입니다. 성공하고 싶으십니까? 담대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렵고 힘들어도 두려워말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할렐루야!

담대함은 성공자의 부모이고 두려움은 멸망자의 부모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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