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는 자가 온전한 자다 (약1:2~4)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난다며 밤에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달려가 주물러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성장통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겪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성장통이란 것이 분명 있습니다. 신앙 안에 들어오면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통증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곧 시험입니다. 그러나 성장통이 병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아픔이듯, 이 시험도 애매한 고통이 아니라 믿음의 장성을 이루기 위해 피치 못할 아픔인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온전하게 만듭니다. 온전이란 평온할 온(穩)과 완전할 전(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폭풍우가 치고 번개가 쳐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과 주름 잡힌 것이 없고 흠이 없는 완전함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훈련하여야 가능한 것이기에 어쩌면 시험은 신앙인에게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바람이 불어야 과실나무에 벌레가 떨어지는 법이고, 용광로에서 금은이 정련되듯, 시험을 통과해야 우리 삶에 알찬 과실이 맺히고, 정금 같은 귀한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그렇다면 온전함에 이를 세 가지 덕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온전해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으며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오직 푯대만을 바라다보고 전진할 수 있는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고 10년이 다 되도록 사라는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아내인 사라의 말을 듣고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이스마엘을 얻고 안도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완전함에 이르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입니다. ‘네 나이 100세가 되었어도, 비록 네 아내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나를 온전히 믿으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온전함에 이르렀기에 이에 순종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 그를 칼로 내리치려했던 것입니다. ‘저 아들을 통해 대(代)가 이어진다고 하셨는데 죽여도 다시 살리시지 않겠는가! 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큰 복을 주시고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자손의 번성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같이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인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다보는 진실한 믿음을 찾으십니다. 손에 뭘 쥐어주면 ‘오! 나의 하나님’ 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며 조석으로 변하는 믿음이 아니라, 변개치 않는 믿음으로 반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해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털어내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이 온전해져야 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주님은 사랑의 온전함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성 밖에 내쳐져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떠난 스데반,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아 전도사로 길러낸 손양원 목사처럼 우리도 사랑의 무한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에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저를 모함하고 조롱하며 인간이하로 대접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많이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랑하라니…’ 그것은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구했더니 하나님이 제 마음을 주관하셔서 이제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제가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랑을 바탕으로 세계의 영혼을 구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내를 온전히 이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내란 곧 내가 있는 자리,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직분에서 떠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견딤으로 전진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인내란 나무가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갈밭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힘들고 어렵지만 일단 뿌리가 깊어진 나무는 가뭄이 와도 물이 마르지 않고 나중에 열매도 맺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노아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더니 그의 가족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련이 필수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거리게 할 환경이 곧 시험이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곧 시험이며, 인내를 필요로 할 만한 일거리와 사람이 곧 시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험을 잘 이겨낼 때 온전한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타고 들어옵니다. 돈에 약하면 돈으로 시험이 오고, 인간관계가 서툴면 사람이 시험을 줍니다. 시험은 마치 권투선수 코치가 그 선수의 약점을 알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때려 강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보완해 완전케 하려 하는 것이니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합시다.
사람들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방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 시험을 헤쳐 나가도록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비가 고치에서 나올 때 그것이 힘겨워 보인다고 도와주면 그 나비는 나오자마자 죽어버리고 맙니다. 고치를 빠져나오는 고통을 겪어야 나비의 양 날개에 힘이 붙어 날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시험 볼 때 어느 선생님이 제자 대신 문제를 풀어줍니까?
태양만 내리쬐면 사막이 되고 맙니다. 비도 오고 천둥도 치고, 때론 강풍도 불어야 생태계가 살아나고 더불어 나도 살게 됩니다. 쭉 뻗은 고속도로만 달려보십시오. 졸다 사고 나게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우리 삶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하는 성장통이니 시험 앞에 좌절하지 말고 기쁨으로 이겨 냅시다.
지금 시험을 당해 고통 당하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누구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성장시키기 위함이니 감사함으로 기도로 일어서십시오. 시험을 당하는 것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낙심치 말고 승리하십시오.
할렐루야!
태양만 내리쬐면 사막이 된다.때론 태풍도 불어야 생태계가 산다.
인내란 맡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