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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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언제까지 죄에 빠져있을 것인가 (잠1:22~33)

323호 · 2006-05-03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저 사람은 천국에 못 올 사람인데 천국에 와 있네!’ 하고 한 번 놀라고, ‘아니, 그 사람은 분명히 천국에 있을 사람인데 없네!’ 하고 또 한 번 놀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로 인해 다시 놀란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며, 그 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성도들 중에 더러 두 얼굴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용 얼굴과 교회 밖의 얼굴을 가지고 사는 사람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오면 봉사도 잘 하고 모범적인 것이 전형적인 성도의 모습인데, 교회 문만 나가면 교회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죄를 물 먹듯 하고, 타락한 모습으로 사는 이중인격을 가지고 사는 자들 입니다.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일에 잠시 예배 때 뵙고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고 돌아서서 나오면 우리를 못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분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찰하고 계시며, 숨어서 행하는 모든 것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셉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연모하여 그를 취합니다. 그런데 밧세바의 남편은 바로 다윗의 충직한 신하로 전쟁터에서 다윗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자였습니다.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갖게 되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려고 우리아를 집에 보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그를 최전방에 나가 적군에 의해 죽게 합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행한 일이었습니다. 본 사람도, 이 사실을 안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보셨고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 그를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12:9).

요셉도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둘만 입 다물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요셉은 알았던 것입니다.

사과 씨를 뿌리면 사과가 열리고, 무씨를 뿌리면 무가 나지요? 그럼 죄를 심으면요? 당연히 죄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가 하는 수고와 해산의 고통이 다 아담이 범한 죄의 열매 아닙니까? 다윗도 죄를 심었으니 죄의 열매가 맺힘은 당연합니다. 물론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훈계에 깨달아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뿌린 것은 거둬야 합니다.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0,11). 이것이 남의 아내를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인 죄의 대가였습니다. 정말 이것은 사실로 이루어져 큰 아들 암논이 이복형제인 다말을 범하자 이에 분노한 둘째 아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고, 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요압의 손에 죽었으며, 셋째 아들 아도니아는 왕위 계승과 다윗의 첩을 달라고 하다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압살롬이 다윗의 첩을 대낮에 왕궁에서 취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씨는 하나 뿌려도 열매는 여러 개 열리듯이 죄의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큰 것입니다. 물론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도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심은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잠시 억울하게 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선의 열매는 어김없이 열렸습니다. 그는 바로의 꿈을 해몽해주고 국무총리 대신의 자리에 올라 애굽과 인근 나라의 백성을 기근에서 구했고, 더욱이 아버지와 형제들과 해후하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지켜보셨던 하나님, 요셉을 살피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당신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시139:2,3). 당신이 은밀히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눈길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도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죄의 대가가 이렇게 큰 것인데도 계속 죄를 짓겠습니까?

사람들은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을 오해합니다. 죄를 많이 지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이는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다시 죄 구렁텅이에 빠진다면 주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우리는 회개합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나가서 다시 죄를 지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회개’란 뉘우칠 회(悔)와 바꿀 개(改)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란 뉘우친 후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에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전환을 말하지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 같은 습성을 버리고 단호하게 죄악을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죄란 빗나간 화살에 비유됩니다. 화살이 처음부터 각도가 엄청나게 빗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활시위에서 떠날 때는 조금 비뚤어지지만 조금씩 점점 멀어져 과녁에서 아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를 짓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되고 무감각해 집니다.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물을 담은 비커에 개구리를 넣고 은근히 불을 지폈더니 이 개구리가 물이 따뜻해지니 물 위로 배를 내밀고 누워 잠을 자더랍니다. 물이 끓어 죽을 때까지요. 악한 마귀의 궤계가 이런 것입니다. 서서히, 조금씩 죄를 더하게 하여 나중에 양심에 화인이 맞아 무감각하게 합니다.

양심에 화인이 맞기 전에, 죄에 대해 문둥병이 걸리기 전에 우리를 돌아봅시다. 간음하고 있습니까?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까?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마약을 합니까? 나단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돌이킨 다윗처럼 오늘 이 말씀을 받아들여 회개하십시오. 단호히 죄를 잘라버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십시오.

옛날에 화투하는 사람이 화투를 끊지 못하자 다시는 화투를 안 하겠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렸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람을 보니 팔목에 화투짝을 끼고 놀음을 하더랍니다. 자신도 한심한지라 팔목마저 잘라버렸는데 나중에는 글쎄 발가락에 끼고 화투를 하더랍니다. 깊이 빠지면 죄는 끊기 어렵습니다. 늪에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나오고 싶어도 이미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결단하고 잘라냅시다. 죄의 뿌리까지 뽑아버립시다.

이제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살지 말고 겉과 속이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삽시다. 주님은 외식하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 무엇입니까? 겉은 번질 하나 속은 벌레가 득실대는 추한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은 절대 겉을 보시지 않습니다.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속까지 깨끗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음란한 곳을 찾고 도적질하며 마약하며 우리 몸을 더럽힌다면 어떻게 주님이 그 안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서 ‘하나님’을 부른다면 하나님이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데 말입니다.

눈이 죄를 향해 돌아갑니까? 그렇다면 눈을 빼내고 나오십시오. 발이 죄악을 향해 달립니까? 그렇다면 발을 절단하고 나오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나 영원히 참지 않으신다

파리똥도 똥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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