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이름, 순종(삼상15:1~23)
“너희들은 외양간에 가서 소를 끌어와 지붕에 올리거라.”
옷이 허름한 친구를 대동하고 갑자기 집에 들어온 남자가 이처럼 명령하자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외양간의 소를 지붕에 올리느라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친구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이봐, 왜 말도 안 되는 일로 식구들을 고생시키는가? 어떻게 소를 지붕에 올릴 수 있어?” “자네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게. 내가 지금 자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다네.” 친구는 하는 수 없이 일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구들이 한참동안 난리법석을 떠는데 남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됐다. 다시 소를 외양간에 매놓아라.” 식구들은 그제야 땀을 닦으며 소를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왜 이런 일을 시켰는지, 그리고 왜 중단하는지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젠 자네 집에 가서 내가 한 대로 똑같이 해보게.” 남자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둘은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친구가 식구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외양간에 가서 소를 끌어다 지붕에 올리거라.” 그러자 저녁을 짓던 아내가 부엌문을 삐거덕 열고 나와서는 “아니, 당신 하루 종일 나갔다오시더니 무슨 일 있었우? 왜 멀쩡한 소를 지붕에 올리라는 거요?” 라고 대꾸하자 옆에 있던 아들이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명령하실 것을 하셔야죠.” 하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친구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와 말했습니다. “자네 가정에 복이 안 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네. 가장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데 어찌 가정이 바로 서고, 복이 온단 말인가? 먼저 순종을 가르치면 복은 절로 온다네.” 그제야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효도요, 국가에 순종하는 것은 충성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순종보다 아름다운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순종과 맹종의 차이를 잘 모릅니다. 맹종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나 순종은 내 의지를 버리고 명령권자의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순종의 모델은 당연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가 들여보낸 하갈을 통해 대를 이어볼까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통(正統)으로 대를 잇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삭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제단의 제물로 내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입니다. 소를 지붕에 올리라는 것보다 더한 명령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왜?’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번뇌가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성경 어느 구절도 아브라함이 고민하는 장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이 미리 수양을 준비하사 이삭을 건지셨고,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하셨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불순종의 대명사는 요나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 요나를 기다리는 것은 광풍이었고,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큰 물고기의 먹이가 된 요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회개했습니다. 순종치 못한 자신을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마치 기름통을 들고 불 속에 뛰어드는 자와 같습니다. 백열등에 뛰어들어 죽는 하루살이 같다는 겁니다. 사울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까지 아껴보지 말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중 좋은 것들을 남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기름통을 들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인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단의 목사들에게 어디로 가서 사역을 하라하면 못 가겠다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이 내민 이유인즉 ‘애들 교육 때문에’, ‘거기는 성도가 적어서 못 가겠다’는 겁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찬양하고선 말입니다. 저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종인지, 예수 이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순종은 내게 합당하든, 합당치 않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예’만 있다고요. 아직 무화과 때가 아닌데 예수님이 무화과를 요구하셨습니다. 분명 합당치 않은 것임에 틀림없지만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신앙의 열매는 곧 순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손을 내미실 때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순종 말입니다. 아직 사람을 태워보지 않은 어린 나귀가 주님을 태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 뜻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요, 조금 있다 돈 좀 많이 벌고 나서 그 때 일할 게요. 돈이 있어야 주의 일도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불순종을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핑계는 살아남기 위한 조잡한 수단인 것입니다. 군에서 상관의 말에 토를 달면 어찌 되는 줄 압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명령에 토를 달면요?
한석봉이 다시 돌아가 글을 더 연습하라는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여 명필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시아로 가려던 바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유럽 쪽으로 발길을 돌리더니 사도로써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오늘의 제가 있는 것도 역시 순종 때문입니다. 저는 한 번도 주님의 명령에 ‘No’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전 재산을 내 놓아라 해도, 본토 친척 처자를 떠나라 해도, 교회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기라 해도 저는 오직 ‘예’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오늘날 예루살렘 교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입는 면 소재 옷에 비교됩니다. 면소재로 된 옷은 몸의 땀을 다 빨아들여 건강에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일론으로 된 옷은 땀도 흡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전기가 발생하여 몸에 해롭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면 소재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명령을 다 흡수하면 우리에게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명령에 정전기나 낸다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나일론 옷이 선호 받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순종하지 못하는 줄 압니까? 내 안에 내 것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 내 목적, 내 생각에 부합되지 않으면 순응이 안 되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내 것이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기준에 맞추고, 내 부모를 내 뜻에 맞추기 때문에 순종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나를 맞추고, 부모님의 생각에 내 뜻을 맞춘다면 불순종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 생각에 맞춥니까? 어찌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알고, 피라미가 고래의 심정을 알겠습니까?
옛날에는 저도 제 입장에서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재산을 다 팔아댔더라도 어떻게 집에 갈 때마다 쫓아내고 옷을 찢을 수 있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시던 어머니에게 아들의 행동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젊어 고생하여 모은 재산을 다 팔아대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그 때 어머니께서 제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뽑았던 것은 자식에 대해 안타까운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순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평등시대에 무슨 순종이냐 할지 몰라도 계란보다 닭이 먼저 이듯, 순종이 먼저거든요. 또 하나님께 순종한 아브라함, 이삭, 베드로, 바울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합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아름답습니다. 할렐루야!
나는 주인인가 종인가? 자신을 살펴라
조직인은 조직을 위해 죽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