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결의 방법은 생각에 있다 (마 9:20 ~ 38)
일제 식민지시절, 조선총독부에서 발간된 ‘문교의 조선’이라는 책에는 한반도의 모습이 ‘중국에 예를 갖춘 토끼의 모습’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혹자는 ‘한반도의 모습은 나이가 많아 허리는 굽고 팔짱을 끼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며, 그렇기에 조선은 누군가에 의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에 분개한 육당 최남선 선생은 ‘우리나라의 모습은 호랑이다’라고 통렬하게 반박했습니다. 일본은 우리민족을 억압하려고 터무니없는 말을 조작하여 우리민족에게 ‘너희는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운명이니 독립은 꿈도 꾸지 말라.’는 생각을 주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이 우리민족의 정신을 흔들어 깨워 ‘우리는 자주독립국가’임을 심었고, 마침내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과거 일본의 모습처럼 우리에게 다가와서 “넌 안돼, 넌 어쩔 수 없어. 그것이 네 능력의 한계야. 뛰어야 벼룩이거든.”하며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하여 자기의 손아귀에 잡아두려 합니다. 악한 것들은 행동에 제약을 가하기 전에, 생각부터 잡습니다. 생각에 부정적인 것만 주입하면 자연히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부정적인 행동은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가룟 유다의 생각이 결국 예수를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기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하여 그의 인생은 철저하게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개의 새끼는 개고, 고양이의 새끼가 고양이이듯, 사람의 자녀는 사람이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같은 신적 권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 하셨거든’(요10:35).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 첫 장을 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그 분은 처음부터 계신 자요, 마지막이 되시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이시요,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신 분이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묵은 지경을 갈아엎듯, 생각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친구 둘이서 사냥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만 실수로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겁이 난 친구가 자꾸 허우적거리자 몸이 더욱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밖에 있던 친구는 이 늪이 얼마 전에 자신이 빠졌던 늪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늪이 절대 깊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친구에게 “이봐, 다리를 쭉 펴봐.
그러면 허리정도밖에 닿지 않아.”라고 말했으나 친구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며 죽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들고 있던 사냥총을 늪에 빠진 친구를 향해 겨눴습니다. “친구, 미안하네. 자넬 구할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네. 잘 가게나.” 그러면서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자 “너 미쳤어?” 하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니 늪에 있던 친구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늪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는 나오자마자 친구의 멱살을 잡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는 자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야. 자네의 생각을 겨냥할 걸세.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 말이야.” 친구는 늪을 빠져나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과감히 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를 경험해본 자는 반드시 문제에는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매사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경험에 미숙한 자요, 삶의 노하우(know-how)를 갖지 못한 자입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노하우를 가진 자에게 배우면 되는 겁니다. 노하우를 가진 자의 말을 들으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분을 따라가면 사는 길, 해결의 길, 행복의 길,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육신을 입고 인생을 체휼하셨기에 삶의 문제와 무게를 아시고, 자신의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코자 하십니다. 그러나 대단한 노하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주저한다면 늪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 된다’는 생각을 깨어버리고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생각은 곧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들려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비가 예수님께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도와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먼저 그의 흐리멍덩한 생각을 깨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하시고는 귀신을 내쫓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만 만지면 낫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는 제 마음이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9:21). 그래서 그는 평생소원인 병에서 나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바디매오는 그의 생각을 정확히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51).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즉 낫고야 말겠다는 네 생각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한 집사님이 안수를 받으러왔습니다. “목사님, 사업을 축복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있는 열과 성을 다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사님, 사업이 잘 될 것 같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집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글쎄요. 하도 불황이라….” 이러는 겁니다. 그럼 뭣 하러 기도는 받으러 오는 겁니까? 생각이 그 모양인데 어찌 그 사업이 잘 되겠냐는 겁니다.
저는 안수에 앞서 묻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병을 낫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반응은 다양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멘’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눈만 껌뻑거리는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확실한 대답을 한 자를 치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소유한 자와 함께 해야 하는 겁니다. 생선가게 가면 생선냄새가 배듯, 부정적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린 나이가 들어 이제 사고를 바꾸기에 늦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나이 드신 분은 자녀들에게, 손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만사 긍정적인 생각으로 임하라. 그러면 안 보이던 길이 보이고,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생각이란 청사진입니다. 곧 미래에 대한 설계도요, 미래상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설계도면을 흐릿하게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어 결국 부실 공사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건물을 짓고 보니 물이 새고, 한 쪽이 기울어져 허물어야 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은 불완전한 미래와 실패한 삶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미래입니다. 과거의 생각이 당신의 현재이듯, 지금의 생각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짓습니다. 미래에 행복의 수레에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근심의 수레를 끌 것인가는 지금 당신이 어떠한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생각은 보이지 않으나 핵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 몸에 행동지침을 내립니다. 오늘 부정적인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옵시다. 생각의 주인은 나 자신임으로 내가 결단하는 순간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의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운명을 낳는다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은 생각이다 가장 바꾸가 쉬운 것도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