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은 그 지도자의 수준을 초월할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인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절,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큰 혼란에 빠져 전전긍긍하였다. 분명한 하나님의 기적을 무시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가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자신들의 권력유지 쪽으로 가닥을 잡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고 말았다. 공격이유는 감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칭(僭稱)했다는데 있었다. 민심을 동요시키는 암적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현상은 동일하다.
사실 국내에서는 잘 가늠하기 힘들겠지만, 해외 현장에서 집회를 진행하다보면 기사와 표적이 늘 동반되는 총회장 목사님의 사역이 그 지역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곤 한다. 말로만 듣던, 혹은 생전 처음 보는 기적의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니 그들의 혼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들의 반응은 반드시 세 가지로 나뉜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자들이 있고, 반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교권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방관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며 정말 지도자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성도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목자가 취하는 태도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번 집회에도 역시 동일한 사건이 나타났다. 집회 첫날 우리는 참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번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쪽으로 1,200km나 떨어져있는 체르노프쩨라는 도시에서 어느 목사가 많은 성도들과 찬양단을 이끌고 온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찬양을 돕고 다음에는 그 도시로 총회장 목사님을 모시기 원한다고 했다. 앰프 및 촬영장비까지 다 실어 와서 사용하게 해주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집회 첫날, 두 팀의 찬양단이 찬앙을 인도하였다 한 팀은 하리코프의 찬양단이었는데 춤추고 박수치며 아주 뜨겁게 찬양을 하였다.
또 한 팀은 멀리 체르노프쩨에서 온 팀이었는데 그 찬양단은 단에서 찬양을 조용히 끝내고 내려간 후 좌석에 앉더니 도무지 요지부동이었다. 찬양 리더가 혼신을 다해 찬양을 인도하는데 박수도 칠 줄 몰랐다. 모두가 율동하며 찬양을 하는데도 그들은 조용히 서있기만 했다. 나중에 총회장 목사님이 등단하셔서 ‘예수님 찬양’을 다함께 부르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총회장 목사님은 그들을 보고 ‘왜 그러고 있냐’며 찬양의 능력에 대해 설교하시기 시작했다.
시편의 말씀들(시편 146~150편)을 인용하며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박수치고 춤을 추며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라고 명령하셨다.’고 가르치시고 어린아이처럼 찬양할 것을 주문했다. 집회는 정말 천국잔치처럼 찬양으로 뜨겁게 진행되었고, 찬양과 기도하는 가운데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는 성령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첫날 집회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 멀리서 차를 대절하여 찬양단을 이끌고 온 목사가 잔뜩 시험에 든 것이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이 깊이 뿌리내린 곳이다. 아직도 가장 큰 종파는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정교회이다. 개신교에도 여러 교파가 있지만, 무덤처럼 조용한 정교회 예배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교파들이 많다. 오순절교단에도 교회마다 예배 스타일이 다르다고 한다.
조용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어찌 조용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것은 꿈틀대며 용솟음칠 수밖에 없다.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따라서 박수치며 율동하며 찬양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저 ‘거룩거룩’ 스타일로 조용히 앉아서 예배드린다. 그런 자신들의 예배 스타일을 비판했다고 생각한 그 목사는 함께 온 찬양단과 성도들을 이끌고 다음날 떠나겠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그 먼 거리에서 신이 나서 올 때는 언제고 그만한 일로 돌아서다니, 그럼 자기 기분에 들떠 행동했단 말인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어쩌란 말인가.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에게 배우느냐가 그래서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집회를 주관한 목사들이 떠나겠다는 목사를 찾아가 춤추며 찬양하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것이며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 말씀은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예배 방식을 갑자기 바꾸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그들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조용히 묵상하듯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진리로 알고 절대로 변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가르치는데도 요지부동이다. 결국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위인 셈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결국 잘못 가르친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를 만난 성도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조용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어찌 조용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제 성경의 비밀, 아니 진실을 알게 된 그 성도들도 비록 지도자 때문에 돌아가지만 분명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예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는 말씀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살아있는 것은 꿈틀대며 용솟음칠 수밖에 없다.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진실을 호도하고 자신들의 지위에 급급한 지도자들은 속히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함이 마땅하다.
이튿날, 총회장 목사님은 세미나를 통해 ‘다윗이 악기를 연주할 때 사울에게서 악신이 떠나갔다. 그러니 병든 자들 위하여 찬양하라’고 하셨으며,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찬양하자 옥문이 터진 사건, 예수 믿는 자의 열매는 찬양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라며 성경을 조목조목 찾아가며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찬양이 시작되자 성도들이 갑자기 단으로 뛰어 올라 춤추며 박수치며 큰 소리로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집회 전 어느 목사는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지 말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더니 강의를 듣고는 어느새 단에 올라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인간들이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권, 교리에 흔들린다. 그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왔는데도 제사장들은 귀신도 알아보는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봤는지도 모른다. 아니, 못 알아봤다기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누대에 걸쳐 공고히 다져온 그들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날아갈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지금 다시 예수님이 오셔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혈안이 될 지 모른다.
세미나 중에 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서 세르게이 목사가 가족과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세미나 말미에 단에 올라와 스페인어 찬양인 ‘아이 빅토리아(Hay Victoria, 승리가 있다)’를 러시아어로 개사한 찬양을 피아노로 반주하며 성도들과 함께 신나게 불렀다. 그의 출현은 동요하던 하리코프의 목회자들을 안돈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세르게이 목사는 자기가 만난 이초석 목사를 그들에게 설명하며 그가 참 하나님의 종임을 인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는 이미 한국에도 두 번이나 다녀갔고, 총회장 목사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곳곳을 다니며 총회장 목사님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지난 주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들’ 코너 참조). 조직은 그 지도자를 초월할 수 없다. 지도자의 한계가 곧 그 조직의 한계인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히 배우려 힘써 노력하는 지도자들이 아쉬운 시대다.
(다음주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