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에 잘해야 만사형통한다 (사 38:1~8)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하나님의 종, 사도 이초석’ 이라고 말하면 교만하다고도 하고, 더러는 ‘저러니 이단이지’ 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교만한 것이 아니라 당당한 것입니다.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하늘나라의 전권대사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전세계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포괄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되어 목숨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하며 가는 곳마다 자신을 사도라 칭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뵈었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저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다 버렸고, 가정이 깨져나가고, 세상이 돌을 던져도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모함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했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대로 갔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살아계신 주님을 목도케 했습니다. 저는 세상이 비웃어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도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사도 이초석’이라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재위 14년이 되었을 때 밖으로는 산헤립이 침공했고, 자신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통고합니다. 벼랑 끝에 선 히스기야는 이 말을 듣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여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이에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가 궁궐을 나가기도 전에 마음을 돌이키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성을 보호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되씹어볼수록 참으로 멋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대체로 주의 종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안수해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 혹은 “주여, 저를 용서해주시고 살려주세요.”라고 합니다. 물론 회개해야 하고 주의 종의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뭔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에 놀라 이사야 선지자를 붙잡고 애걸복걸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잘못했으니 살려 달라’고 떼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바로 면벽하고 당당히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내가 주 앞에 진심으로, 전심으로 행한 선한 일을 기억하소서.” 누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명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온 자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평소에 하나님 앞에 잘해온 자가 당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을 앞둔 히스기야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나요? 그는 즉위하자 곧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산당을 비롯한 모든 우상을 제거했습니다(왕하18:1~7). 그는 자신의 공적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 행하였음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아뢰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는 당당했던 것입니다. 교만과 당당함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나 당당함이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떳떳한 자세인 것입니다.
당신도 이런 당당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 평소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살았고, 그의 계명 안에 거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추억하면 흐뭇해하실 만한 일을 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지난 일을 기억하실까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여 은행에 저축하고, 보험을 들고, 연금을 들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 찾아 쓰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 기도해두는 것이 무엇입니까? 위급할 때 그 기도를 찾아 쓰는 것입니다.
기도의 독을 꽉 채워두면 필요할 때 바가지로 퍼 쓰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저축해놓은 것을 기억하소서.’ 그런데 평소에 저축한 것이 없으면 아무리 은행 문을 두드리고, 은행장에게 사정을 해도 얻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평소에 쌓은 것이 없다면 무어라 아뢸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잘해야 합니다.
평소에 영·혼·육의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저축해 놓으면 여유가 있고, 평소에 운동으로 몸을 단련해 놓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할 수 있으며, 평소에 학문을 연마해 놓으면 난제 앞에 당황하지 않을 것이고 평소에 하나님의 일에 자원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이 그 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자가 세상과 가정에서 당당하고, 모든 자와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가 언제 입니까? 매일입니다. 매순간입니다. 고로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평소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성공자는 ‘지금’을 잡으나, 실패자는 늘 ‘내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저축하고, 지금 운동하고, 지금 공부하고, 지금 사랑하고, 지금 주의 일을 행하면 언제나, 늘, 항상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지은 죄는 오늘 회개해야 됩니다. 그것을 미루다보니 죄라는 짐에 눌리게 되고 그 죄에 눌려 만사 불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름 1m의 하수도관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곳에 이물질이 끼어 반 정도를 막고 있다면 그 하수도관은 흐름이 원활치 못할 것입니다. 이물질이 끼면 바로바로 처리해야 흐름이 원활한 것처럼, 우리의 죄도 그 날 회개하여 사함을 얻어야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아 죄가 끼니까 주눅이 들고, 당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것을 기억하지 않으시며 치부해 놓으시지도 않으십니다. 고로 매일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당당한 자녀로서 아버지를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부모 앞에서 고개를 처박고 있을 때가 언제 입니까? 뭔가 잘못했을 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용서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잘못한 일들을 다 용서 빌고 이제부터 부모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회개하고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의 뜻대로 살아봅시다. 그러면 주님 앞에 당당할 수 있을 것이며, 만사형통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증한 짓 아닙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일생일대 최고의 복을 받으려면,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려면 평소에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 주가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시119:165). 주님은 회개한 것은 기억하지 않으시나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다 기억하사 보상해 주시는 분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선한 행위도 분명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떳떳하고 당당한 크리스천으로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당당함은 하나님의 뜻 아래 행하는 것이다
성공자는 '지금'을 잡으나 실패자는 '내일'이라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