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떤 사람이냐? (마 9:17~38)
요즘은 모조산업이 발달하여 웬만한 모조품은 진품보다 더 정교하고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합니다. 여성들의 액세서리를 보면 이것이 진짜 금인지, 아니면 금을 도색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흡사합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를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금반지인지, 가짜 금반지인지 알려면 돌에 문질러보면 가짜는 도색한 부분이 깎여나가고 허연 속을 내보입니다. 다이아몬드도 돌로 깨뜨렸을 때 깨져나가는 것은 가짜입니다.
‘사랑’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사랑이 시작될 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무도 쉽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돌에 문질러졌을 때, 사랑이 돌에 깨뜨려졌을 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구분이 갑니다. 어려움이 오고, 아픔이 와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은 진짜 사랑, 곧 ‘~불구하고’의 사랑이며, 조그마한 환난이 와도 쉽게 변질되는 것은 모조사랑, 가짜 사랑, 곧 ‘~ 때문에’ 사랑입니다.
‘~ 때문에’ 사랑은 사랑에 조건이 붙은 것으로 순수성이 없는 불순물 덩어리입니다. 곧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순도가 낮으면 변질이 되고 깨지기 쉽듯, 사랑도 순수함이 없이 수단으로 쓰였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변질되고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이혼율이 높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배운 것이 많기 때문에’ 맺어진 사랑은 그 아름다움이 떠나고, 돈이 날아가고, 배운 것이 활용되지 못할 때 미련 없이 깨지고 마는 겁니다. 그러나 ‘~불구하고’의 사랑은 순수하여 아무리 돌에 세차게 문질러도, 바위가 와서 내리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구하고’의 사랑을 실천하시고 모범을 보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분은 병들고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들을 더욱 사랑하셨으며, 그런 자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변질되기 바랐습니다. 그래서 수치와 모욕을 주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모조된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이었기에 결코 뛰어내리지 않았고 물과 피를 다 쏟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사랑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불행하게도 ‘~ 때문에’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를 통하여 자신의 야심을 이루고픈 욕망이 그 안에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볼 때 예수의 장래가 불투명하고 암울하자 예수를 팔아넘겼습니다. ‘~ 때문에’ 사랑이 낳은 비극입니다.
저는 가끔 현대판 가룟 유다들을 봅니다. 예수의 종이 되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고 찬송을 부르며 신학교에 들어온 자들이 정작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조금 외진 곳이나 낙후된 곳에 가라고 하면 못 가겠다고 합니다. ‘애들 학교 문제 때문에 못 갑니다.’, ‘거기 가면 생활이 안 됩니다.’ 이러는 겁니다. 주의 종은 직업이 아닙니다. 소명이며 사명입니다. ‘애들 학교 문제가 있더라도 가겠습니다.’ 해야 예수를 향한 참사랑이요, ‘먹을 것이 없더라도 주님이 보내시면 가겠습니다.’ 해야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그 ‘~불구하고’의 사랑이 확인될 때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넘치게 채우십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 때문에’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로 인하여 위험이 오자 예수를 세 번씩 부인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변질된 사랑을 후회했습니다. 배신자를 찾아오신 예수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 후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에 문질러지고, 돌에 깨뜨림을 당해도 변하지 않는 ‘~ 불구하고’ 사랑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금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기도한 죄로 사자 굴에 던져질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지켰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신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다물게 하셨고, 그를 더욱 높이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금신 상에 절하지 않은 죄를 물어 풀무 불에 던져질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이 한 마디가 ‘~불구하고’의 사랑을 대변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던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 아옵소서.’ 누가 참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하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제 이야기도 좀 하겠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구하고’ 사랑이 아니면 절대 주의 종이 될 수 없는 불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주님의 사랑에 할 말을 잊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제가 안수 받았던 교단에서의 제명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의 배척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역경들이 저를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모진 바람인들, 폭풍인들 못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참고 인내했더니 하나님은 오늘의 이초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그 ‘~불구하고’의 사랑이 내 것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바람이 좀 불고, 폭풍이 치고, 내 것이 좀 잘려나가면 더 이상 주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야 해충이 떨어지고, 폭풍이 쳐야 바다가 정화되고, 가지치기를 해야 나무가 거목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사 당신을 더 크고, 더 넓고, 더 아름답게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오해의 안경을 벗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당신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아비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액세서리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자신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당신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 때문에’ 사랑인지, 아니면 ‘~불구하고’의 사랑인지 말입니다. 혹 당신의 사랑이 ‘~ 때문에’ 사랑이라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랑이 변질되면 누구 손해입니까? 바로 당신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결과가 영멸(永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정말 ‘~불구하고’의 사랑이 아니면 가다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끝까지 가면 반드시 영원한 축복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진짜 금인지 가짜 금인지는 문질러 보면 알 수 있다
폭풍이 쳐야 바다가 정화되고 바람이 불어야 해충이 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