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막 10:46 ~52)
제가 군대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요즈음에는 군대도 많이 개선되고 풍족해졌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군에 있을 때만 해도 부족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한창 때인지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해서 집에 편지를 썼습니다.
딱 한 줄 ‘아사직전(餓死直前)’, 이렇게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제 부모님께서 달려오셨지 뭡니까? 부모님은 저를 보자마자 “무슨 일 있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당신 장남에게 큰일 난 줄 아시고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 오셨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죄송스럽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부모님이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둑하니 용돈을 챙겨 민생고를 해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 부모이기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부모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철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소경 바디매오는 간절한 마음에 큰 소리로 예수를 불렀습니다. 마치 제가 ‘아사직전’이라고 쓴 편지처럼 갈급한 심정으로 예수를 불렀던 것입니다. 여리고로 가는 예수 앞에 어찌 소경이 바디매오 한 사람 뿐이었겠습니까만 유독 바디매오 만이 예수를 소리 질러 불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소리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부르시니 바디매오는 겉옷을 던져 버리고 예수 앞에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바디매오는 지체하지 않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즉시로 바디매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이 그의 눈을 보게 했다고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디매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아야 우리도 영·혼·육의 구원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바디매오는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구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조차 깨닫지 못한 진리, 곧 예수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분이 구원의 길이 되심을 그는 예수를 부르는 호칭에서 이미 시인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부르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이 예수를 향한 호칭에 이미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에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라고 답하자 예수께서 “그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흡족히 여기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하셨습니다. 예수가 누구이신 줄 바로 아는 것, 그것은 복 중의 큰 복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의 관심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누구인 줄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 하십니까?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합니까?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습니까? 이 믿음이 있어야 예수께서 당신을 돌아 볼 것입니다. 아이가 제 부모를 향하여 “아저씨”, “아줌마”, 이렇게 부른다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당신과 예수와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 10).
둘째, 바디매오는 간절한 마음에 큰 소리로 예수를 불렀습니다.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 “응애응애”하고 울어대는데 안 달려갈 엄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순하게 “응애”하고 울면 “조금만 기다려, 이것만 끝내고 젖 줄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성통곡해 보십시오.
부모도 뛰어가거늘 어찌 하나님이 잠잠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왜요? 자존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컸다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어른인 체 하는 겁니다. 남이 나를 보고 있는데 어떻게 크게 기도하느냐는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습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야죠. 또 옆에서 시끄럽다고 야단 좀 치니까 주저앉는 겁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그는 옆에서 제지하자 더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를 불렀습니다. 지금 당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내어 던지고 예수를 부르지 않으면 예수는 당신을 지나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 부르짖을 때입니다. 당신이 큰 소리로 예수를 부르면 분명 예수가 당신을 부르실 것이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겁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셋째, 바디매오는 예수가 오라 하자 그의 겉옷을 내어 던지고 달려갔습니다. 바디매오는 앞이 보이지 않아 방향감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 돌부리가 있는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예수가 오라 하자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내가 보이지 않으니 예수가 오십시오.”가 아니라 오라 하실 때 ‘아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란 할 수 있는 것에만 ‘아멘’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 도저히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에도 ‘아멘’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앞으로 나아갈 때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겠습니까? 비틀거리다 넘어졌을 때 예수가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분명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을 겁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돕는 사람과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가 손을 내밀어 준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 빠질 때 예수가 손을 내민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곧 믿음 말입니다.
이는 마치 장사꾼이 물건을 팔 때 돈만 보고 파는 것과 같습니다. 물건을 팔 때 사는 사람의 외모를 보거나 남녀노소를 구분하여 물건을 팝니까? 아닙니다. 오직 돈만 보고 물건을 내어 주듯이 오늘 하나님은 당신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학력이나 재력으로 당신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오직 바디매오처럼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탄식하고 계십니다. “내가 올 때 그런 믿음을 보겠느냐?”
지금 가만히 앉아있으면 평생 앞을 못 봅니다. 오늘 예수를 부르세요. 예수가 나의 구원자 되심을 믿고 크게 예수를 부르세요. 분명히 예수가 당신을 돌아보실 것이며 당신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함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이 아닙니다. 당신의 믿음 없음이 영·혼·육의 구원에서 멀게 하며, 당신이 부르짖지 못하므로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어렵게 믿지 마세요. 예수는 무식하고 단순하게 믿으세요. 오늘 큰소리로 예수를 부르세요, 바디매오처럼.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멈추는가 목적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라
목마를 자가 샘물을 파듯 성공은 소망의 열도에 비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