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타령 그만 하고 일어나라! (잠 24:30~34)
저는 원래 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목회하기 전에는 분재 가꾸는 법을 배우려고 화원에 자주 들리곤 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화분에다 연산홍이란 꽃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꽃이 어느 정도 자랐기에 정원에 옮겨놓으려고 화분에서 꺼냈습니다. 꺼내고 보니 뿌리가 화분모양을 따라 돌돌 말려 있는 겁니다.
그 연산홍을 그대로 정원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영 꽃이 부실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캐내어 보았더니 아직까지 뿌리가 화분에서 있던 그 형태로 있는 겁니다. 그 너른 땅에 옮겨놨는데도 말입니다. 이 연산홍은 고정관념 속에 살고 있었던 게지요. 화분에서 살던 고정된 생각이 너른 땅 속에서도 웅크리고 살게 한 것입니다. 이럴 때는 구부러진 뿌리를 잘라 주어야 한다고 화원 관리사가 말해줘서 그대로 해주었더니 이제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잘 자라고 있습니다. 새 뿌리가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고정된 관념, 이것이 팔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왜 달리신 줄 압니까? 우리의 팔자를 잘라내고 잘 살고 건강하라고 고난의 길을 자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 스스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주저앉아 있습니까?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 설명할까요? 얼마 전 88체육관에서 동물 서커스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맹수가 원숭이와 나란히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맹수가 어떻게 원숭이와 놉니까? 어떻게 한 줌 식사꺼리밖에 안 되는 것의 놀이감이 됩니까? 이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맹수를 조련할 때 앞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두고 너머에 원숭이를 둡니다.
그러면 맹수가 달려들 것 아닙니까? 그러다보면 유리벽에 얼굴을 찧고 주저앉게 됩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머리에 각인이 되는 겁니다. “아, 원숭이를 잡아먹으면 큰일나는구나!” 그래서 나중에 유리벽이 없어져도 맹수는 원숭이에게 손을 못 대는 겁니다. 팔자는 이 유리벽과 같은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당신에게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네 팔자야. 부지런 떨어봐야 별 수 없어.”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준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일어나 뛰어라.” 유리벽에 세게 부딪치면 깨집니다. 팔자란 부지런히 도전하면 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빗물이 바위를 뚫지 않습니까?
고정관념, 우리가 말하는 팔자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연산홍의 말린 뿌리를 잘라내듯이 고정관념을 잘라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장과 발전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방울 튀긴 잉크 때문에 도화지를 구깁니다. 그러나 그 잉크자국보다 넓은 흰 바탕을 보고 기사회생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사람들이 ‘운명론’을 믿는 자들은 어쩌면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을 핑계 삼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현재가 형편무인지경인 까닭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안일한 사고, 고정관념을 깨는 것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는 곧 영·혼·육이 게으른 탓입니다. 영·혼·육이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본질을 변색시키고 상실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게으른 자의 결과에 대해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결국 가난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남의 수하에서 부림을 당하게 되고, 구걸해도 얻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게으름이란 악이요, 암적 존재로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것이 자신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아침형 인간’이 되자는 캠페인이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는 시간에 일어나 자신을 갈고 닦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동일한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는 24시간을 12시간으로 줄여 살고, 어떤 자는 48시간으로 배가시키기도 합니다. 이는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낳습니다. 인생이란 출근시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근시간에 5분 늦잠을 자고 나가면 길이 막혀 50분 늦어지는 것을 다 경험해봤을 겁니다. 날마다 5%의 게으름을 떨면 남들이 이룬 성과의 50%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성공학의 지론입니다.
요셉은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국땅에서 총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가진 무기란 부지런함과 정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좋은 무기가 없었으므로 적국에서 승리했던 것입니다. 명예란 부지런의 소산입니다. 요셉의 아비 야곱도 엄청나게 부지런했습니다. 창세기 31장 40절에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하지 않습니까? 부(富)도 부지런의 산물입니다.
느헤미야가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을 때의 고백입니다.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느4:23). 일의 성취란 이처럼 부지런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부지런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고 시편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을 향하는 자는 축복이 넘칠 것이며, 새벽을 달리는 자에게 건강이 따를 것이며, 새벽에 책을 붙잡는 자에게 지식이 충천할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멕시코 집회 중에 TV방송 인터뷰를 했는데 멕시코 사람들에 대해 한 말씀해 달라기에 “아주 낙천적이고 좋습니다. 그러나 좀 게으른 것 같습니다.”라고 일침을 박아주었습니다. 이는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거든요. 같은 사막에 세워진 천사의 도시(Los Angeles)와 멕시코를 비교해보면 한 번 젖은 타성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막에 강을 내는 것, 말하나마나 부지런한 자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시간의 연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곧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농부는 천수답만을 의지하나 부지런한 농부는 우물을 파 인생을 개척할 것입니다. 기업의 연구실이 불이 꺼지는 순간 남들보다 뒤처지게 되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룬 기업이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부지런하면 남편의 와이셔츠에 빛이 나고 아이들이 깔끔할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가 부지런하면 성도들이 이를 본받아 열심히 전도하여 절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고, 열심히 찾는 자는 원하는 것을 찾을 것이며, 부지런히 문을 두드리면 행복의 문이, 성공의 문이, 그리고 천국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오늘 베짱이처럼 살면 내일 개미한테 구걸하러 가야 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개미에게 부지런함을 배우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당신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세월을 아끼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라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거룩한 파괴가 거룩한 성공을 가져온다
너의 고정관념은 무엇인가? 자신을 살펴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