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1345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시계 속의 시간과 마음속의 시간

1345호 · 2026-02-15
세상을 보는 창

시계 속의 시간과 마음속의 시간

새해가 되었다는 말은 달력의 숫자가 바뀌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크로노스의 흐름 안에서 우리는 또 한 해를 맞이했지만, 이 해를 어떻게 살아갈지는 마음속의 시간, 곧 카이로스에 달려 있다.

크로노스는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으로, 365일이라는 숫자, 24시간이 반복되는 하루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는 이 시간에 맞추어 계획을 세우고 약속을 정하며 일정을 관리한다. 크로노스는 반복과 규칙성을 통해 삶을 안정시키지만, 동시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유한성과 한계를 깨닫게 한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시계로 잴 수 없는 마음속의 시간, 주관적인 시간이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내 인생과 영혼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이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와 은혜가 담긴 순간이다. 즉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느껴지는 결정적 순간으로,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용서를 결단하는 순간,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순간이 모두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인간의 내적 경험과 하나님의 부르심이 만나는 자리로 삶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신앙인은 크로노스 안에서 카이로스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시공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때일 수 있다’는 감각을 갖는 것이 믿음이다. 바울이 ‘세월을 아끼라’(엡 5:16)는 것은 흘러가는 크로노스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카이로스의 기회를 붙들라는 초대이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꾸면 같은 시간, 같은 일정이라도 그 안에 ‘왜’라는 질문을 담을 때 시간은 전혀 다른 깊이를 지닌다. 또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짧은 성찰을 통해 지나간 크로노스를 다시 감사와 깨달음의 시간으로 되살릴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시선으로 시간을 바라볼 때, 실패와 고난의 순간조차 준비와 성장의 기회가 된다.

2026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졌다. 크로노스의 눈으로 보면 또 한 해가 지나가고 나이를 더할 뿐이나 카이로스의 눈으로 보면 새해는 새로운 만남과 깨달음, 새로운 순종과 사랑으로 내가 서 있는 땅이 기름져 있지 않을까?

이정금 전도사

경배와 찬양

내가 만들어진 모습대로

얼마 전에 10km 마라톤 경주에 나갔습니다. 완주하고 완주메달을 받았는데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당일에 현장에 가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에 참여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 달리기를 잘해서 빠르게 달려나가는 사람들, 저처럼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뛰는 사람, 또 저보다 이전에 포기하고 멈춰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3km 정도 달렸을 때 이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포기는 자살이라고 배웠기에 힘들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습니다. 그렇게 5km 반환점을 지나고, 마침내 10km를 돌파했습니다.

겨우 10km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남들을 신경 쓰고 달렸다면, 그들을 따라가느라 오버페이스를 했더라면 결국 지쳐서 쓰려졌을 것입니다. 혹은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만둘까?’ 했더라면 완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완주의 기쁨을 생각하며 남들을 보지 않고 뛰었고, 결국 완주를 해냈습니다.

남들을 바라보며 남들 따라가려고 하면 내 인생을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남들과 비교하면서 살라고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각자의 달란트를 찾고, 그 달란트를 활용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남들이 잘난 것 같고, 남들이 앞서가는 것 같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찾고, 나의 속도에 맞춰 나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걷는 것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릴 그 뜻대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롬12:3~8).

윤에녹 전도사

생명의 말씀

신앙은 개념이다

대학에 들어간 큰아들이 중학교 동생들을 앉혀놓고 공부(특히 수학)에 대해 조언하는 걸 들었다. 험난했던 실전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기에 매우 진솔하게 들렸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양보다는 질적인 공부에 우선하라고 일침을 주고 있었다. 학원에서 배우는 많은 양의 문제들을 소화하려면, 정확하고 견고한 기초 개념 위에 토대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실하고 부정확한 개념 위에 쌓는 모래성은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공부 많이 한 것 같은 ‘감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이다. 같은 용어로 공부를 하지만 개념 정리가 불확실할 때, 과정은 풍성한 듯해도 결국 오답이 되듯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소위 강의 잘한다는 일타 강사들 중에서도 개념 정리에 탁월한 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애청하고 있었다.

보통 뉴스 보도에서 수능 만점자들이 말하길, “저는 교과서로만 공부했어요!”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개념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만점으로 향하는 공부의 방법론은 사람마다 다양하겠으나, 결국 정답으로 가는 정확한 개념(공식)은(?) 오직 한 길뿐이다. 그 개념이 아니고서는 오답처리 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개념 정립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개념이 아니고서는, 과정과 무관히 마지막엔 오답처리 될 수도 있다. 개념을 잘못 잡아 버림받은 반면교사가 성경에도 많다. 마음의 할례로 개념변경이 되었는데도, 육체의 할례에 여전히 집착하는가? 성경의 예수가 아니고, 다른 개념의 예수로 구원이 가능한가?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데, 내 뜻대로 연줄을 끊고 날아가는 것이 자유인가? 모두 개념오류다.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예수’를 믿지만, 천태만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신앙적 소통은 힘들어진다. 마치 사사기 시대처럼 각자 소견에 옳다 하는 왜곡된 개념들을 받아들이니 ‘종교통합’운동 같은 것들이 점점 인기를 끌고 있는 거다.

교회, 신앙, 목회자, 사역의 본질적인 개념은 무엇인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금번 목회자 세미나를 통해, 목회의 기초개념들을 점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송직화 목사

나도 건강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하는 한 해를 소망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 가지 권면 가운데 가장 먼저 주어진 말씀이 바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억지로 웃으라는 요구가 아니라, 기쁨이 인간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려주는 약속입니다.

현대 의학 역시 기쁨과 감사, 웃음이 엔돌핀과 도파민,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활성화하여 뇌의 염증을 낮추고 신경세포의 연결을 보호하며, 치매와 파킨슨병, 뇌졸중의 위험을 줄이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쁨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낮추고 엔돌핀, 도파민, 세로토닌의 균형을 회복시켜 자율신경계를 안정시키며, 이로 인해 혈압과 심박이 안정되고 면역 기능이 강화되어 감염과 만성 염증성 질환의 위험이 감소합니다. 지속적인 기쁨은 뇌의 해마와 전전두엽 기능을 보호하여 기억력 저하를 늦추고 치매의 진행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도파민 회로의 안정은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의 위험을 낮추는 보호 인자로 작용합니다. 또한 정서적 안정은 혈관 수축과 혈전 형성을 억제하여 뇌졸중과 심근경색 같은 심뇌혈관 질환의 예방에 기여하고, 불안과 우울이 줄어들면서 수면의 질이 개선되어 만성 피로, 두통, 소화기 기능 장애, 과민성 장 증후군과 같은 기능성 질환의 악순환도 끊어지게 됩니다.

한의학에서도 기쁨은 오장 가운데 심

(心)에 속하는 중요한 감정으로 설명됩니다. 적절한 기쁨은 심기를 원활하게 소통시키고 혈맥을 부드럽게 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며, 얼굴빛과 말소리를 밝게 합니다. 기쁨이 조화롭게 유지될 때 심신, 곧 마음과 정신이 편안해지고 기혈 순환이 원활해져 두뇌로의 혈류가 안정되며 기억력과 집중력이 유지됩니다. 이는 한의학에서 말하는 “신(神)이 안정되면 병이 들지 않는다.”는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억지로 웃는 표정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태도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몸을 움직이고 숨을 고르며 찬송을 흥얼거리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되고,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할 이유를 찾는 생각의 훈련을 통해 자라납니다.

일상의 공부와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교회 안에서 봉사와 섬김의 자리를 통해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내가 여전히 쓰임 받고 있다’는 의미를 발견할 때 기쁨은 더욱 깊어집니다. 예배와 말씀의 자리를 지키는 수고, 완벽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연약함을 하나님께 솔직히 내어놓는 기도와 순종 속에서 기쁨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 자리 잡게 됩니다.

결국 기쁨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더 즐거운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애씀이라기보다 오늘 주어진 삶을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살아내는 순종이며, 그 순종 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과 몸, 그리고 삶 전체를 회복시키는 힘으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32:11).

Dr. 설재현 집사

1345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Text 주일설교
성도들의 간증
Cartoon
붕우칼럼
객원컬럼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