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양다리 걸치지 마!”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제1 명령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간이요 토대가 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말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제사 문제로 너무나 무참한 핍박과 순교가 이어지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의 연속선상에 있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라는 취지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에 대한 논란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요. 왜? 죽인다는 위협이 두려움과 공포였기 때문입니다. 사자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나 풀무불에 태워버리려 했던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이 따라야 할 모델로 제시되었다 하여도, 실제 눈앞에서 사람들이 처절한 고문을 당하고, 무참히 죽어 나가는 현실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켜가야 할 믿음과 신앙의 표준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타협을 그저 비난만 하고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선택한 믿음의 선친들이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성도님들이 가장 먼저 부닥치는 문제가 바로 제사일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그 어떤 목사님들보다 아주 선명하게 제사 거부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실 때 이 제사 문제로 집에서 내쫓기며 믿음의 길을 시작하셨기에 더욱 강력한 자세로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셔 왔고, 지금 역시 조금의 편차도 없이 ‘양다리 걸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제사는 부모를 섬기려 하는 건데, 부모는 신이 아니지 않냐’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아주 명쾌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0~22).
‘네가 하나님보다 강한 자라 생각하면 할 테면 해보라’는 아주 독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요즘 몇몇 교회들이 포교를 위한답시며 기독교 제사법 등, 희한한 말로 구슬리며 타협하려는 흐름이 보입니다. 네,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립니다. 우리가 신앙의 원칙, 곧 하나님 말씀 위에 단단히 서 있지 못하면 언제든지 세상 풍조에 휘둘릴 수 있습니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 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는 찬송가 542장(새찬송 490장)의 시인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참된 꿈을 위하여 타협을 거부하고 순교의 길을 갔던 수많은 믿음의 선친들을 본받아 어떠한 핍박이 있더라도 크리스천의 본분을 다하는 설 명절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명절을 앞두고 목사님은 항상 ‘제사 지내지 마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시지요. 제사를 거부하다 예전에는 죽임을 당했고, 오늘날에는 두들겨 맞기도 하고, 집에서 내쫓기는 일도 당합니다. 그럼에도 기뻐하며 이 길을, 이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앙에 타협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습니다. 내 어머니를 구원하고, 내 동생, 아들, 조카들이 목사가 되는 일 또한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우리 교단이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을 본받아 신앙에 그 어떠한 타협 없이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