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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초대받은 자와 은혜를 거부한 자

1332호 · 2025-11-16
세상을 보는 창

은혜로 초대받은 자와 은혜를 거부한 자

매주 수요일 ‘연우’라는 회사 앞에서 몇몇 믿음 있는 분들과 청년들이 간식을 준비하여, “예수 믿으세요!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예수중심교회입니다.” 하며 전도한다. 대부분은 기쁨으로 가져가지만, 몇몇 분들은 싫은 표정을 짓는다. 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하 9장과 10장에서는 두 장면을 보여준다. 한쪽에는 다윗 왕의 은혜를 전적으로 받아들인 므비보셋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다윗의 호의를 조롱하며 전쟁으로 치닫게 한 암몬 사람들이 있다.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자 사울의 손자였다. 어린 시절 불행한 사고로 두 다리를 다쳤고, 그 후 한참을 ‘로드발’이라는 황량한 곳에서 숨어 살았다. 로드발은 단지 지명이 아니라 ‘잊힌 자’, ‘희망 없는 삶’을 상징한다. 므비보셋이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를 찾아내어 왕궁으로 초대한다. 두려움에 떠는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조상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삼하9:7). 그는 한순간에 버려진 자에서 왕의 식탁에 앉는 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전적인 다윗의 은혜로 말이다. 이는 곧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절망의 ‘로드발’에서 불러내어 ‘왕의 식탁’으로 초대하신다.

그다음 장에서 다윗은 암몬 나하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 사절을 보낸다. 나하스는 과거 다윗에게 호의를 베푼 적이 있었기에, 다윗은 진심으로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암몬의 새 왕과 방백들은 이 호의를 오해하고 조롱한다. 사절의 수염을 깎고 옷을 반쯤 잘라 모욕을 준다(삼하10:4). 다윗의 선의에 그들의 반응은 교만과 불신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게 되고, 패배한다. 은혜를 거절하고 조롱한 자의 끝은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식탁으로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 이 초대는 조건 없는 사랑이며, 전적인 은혜다. 그 초대 앞에 응답은 우리 몫이다. 므비보셋의 삶이 증언하듯, 은혜를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완전히 뒤바뀐다. 믿음은 마음의 문을 여는 단순한 결단에서 시작된다.

‘나는 로드발의 자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왕의 식탁으로 걸어갈 것인가?’

이정금 전도사

경배와 찬양

2100년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총회장 목사님께서 ‘2100년을 바라보고 달리자’고 이야기하십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부끄럽게도 실제로 저는 2100년까지 살 것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지속적인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이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총회장 목사님께서,

“지금 70살이어도 2100년 되려면 50년 넘게 더 살아야 돼!”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그제야 2100년까지를 바라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35살밖에 안 됐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거의 3, 4배에 가까운 시간을 더 살아야 한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단기적으로 생각하고 살면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계획하지 않는 자는 망하기로 작정한 것이다’라고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그저 구호처럼 느껴졌다면, 2100년을 바라보고 뛰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성장을 추구하고, 공부하고, 준비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태된다고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빠르게 변하는 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치고 전파하려면 우리가 더욱 멀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준비되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세상 것을 더 중요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무장하고 변해가는 시대에 발맞춰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엡5:15~16). 하나를 깨닫고 나니 총회장 목사님 그늘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배울 수 있음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다시 깨달으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내겠습니다.

윤에녹 전도사

낮은 울타리

아빠의 마음

추석 명절 때 오랜 만에 아빠와 함께 백화점에 갔습니다. 아빠 옷을 사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아빠의 가을 셔츠 두 벌을 구매해서 건네드렸는데, 그때 아빠의 표정이 참 잊히지 않습니다. 아빠의 얼굴에는 쑥스러움과 고마움, 그리고 기쁨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드린 셔츠는 그렇게 비싼 셔츠가 아닙니다. 아빠가 직접 구매하셨다면 더 좋은 셔츠를 살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엄마가 샀다면 더 멋지고 편한 셔츠를 받으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빠의 표정에 그렇게 큰 기쁨과 설렘이 있었던 이유는 아마 딸인 제가 그 셔츠를 사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셔츠를 사고 신난 아빠는 저를 데리고 제 옷을 사주겠다며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제가 아빠에게 사드린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좋은 옷들을 사주셨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제가 드리려고 했는데 결국은 또 제가 더 받게 되었습니다.

기도 중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두 가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도 우리에게 받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하거나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받길 원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찬양을 원하시고 기도를 통한 우리와의 소통을 기뻐하십니다. 수만 명의 찬양을 받으실지라도 나의 찬양을 또 받고 싶어하십니다.

두 번째는 내가 드릴 때 하나님은 더 부어주십니다. 아빠가 선물을 받고 저를 데리고 가 더 비싸고 좋은 옷을 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분명 더 큰 복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이 깨달음을 주신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것보다 무엇을 받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현저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셔서 저에게 받길 원하시고, 무엇을 드릴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고, 저의 드림을 통해 더 저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드리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구하고만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그로 인해 배로 축복받는 성도가 됩시다.

장수정

치우치지 않은 저울

옳은 말을 옳게 하는 지혜를 주소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그 열매는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진리 자체가 아무리 옳을지라도, 강압적이고 날카로운 태도는 듣는 이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들고, 반발심만 일으킬 뿐입니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12:18).

우리의 ‘옳은 말’이 칼이 되지 않으려면, 진리의 옷을 입힐 아름다운 보자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이 말씀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랑 안에서’ 말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가르치려 들거나 내 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유익과 성장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우리 말에 애교와 유머를 섞는 것은 곧 ‘온유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함은 진리를 부드럽게 스며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상대방이 당장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여 분노하거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기도로 씨앗을 뿌립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은 사랑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지적(指摘)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순간 그 말은 효력을 잃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13:4~7).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어떤 결과가 올까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그’는 바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부드럽고 존중하는 태도로 전달된 진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변화를 일으키고, 결국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합니다. 이는 관계의 파괴가 아닌, 관계를 세우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처럼 말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칼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끌어가는 부드러운 양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옳은 말’을 할 때, 항상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말이 강압적이고 날카로운 칼이 되게 하지 맙시다. 사랑의 태도, 온유한 마음, 그리고 존중의 예의를 갖추십시오. 그럴 때만이 우리의 진리가 상처가 아닌 치유와 성장의 도구가 되어, 우리 주변에 참되고 부드러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그리스도께로 자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할렐루야!

최연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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