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겨진 곳에서​
심겨진 곳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참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계절마다 피어나는 다양한 꽃들을 볼 때 잎 모양이나 크기도 모두 다르고, 저마다 지닌 색감도 너무 예뻐서 “하나님은 정말 멋진 예술가예요!”라는 고백이 절로 나온다.
꽃들은 심긴 장소, 자라는 환경,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르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은 그 꽃들을 다양하게 만드신 분, 피어날 때와 질 때, 자라날 환경과 장소를 정하시고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꽃은 온실에서 사랑과 정성을 받으며 곱게 자라나는 꽃이 있고, 또 어떤 꽃은 길가에 피어 비와 눈과 바람에 노출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미소 짓게 만드는 꽃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경탄하는 때는 다름 아닌 돌이나 바위틈 사이에서 피어난 꽃을 볼 때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꽃이 자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한 가닥 피어나는 꽃,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주위에 다른 꽃들도 없이 좁은 바위틈 사이 홀로 자라서 아주 연약해 보이지만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참 대단하다’ 생각하며 바라보게 한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에 심겨졌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안 이 땅에서 살다가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자유의지를 주셔서 많은 일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는 환경은 선택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졌다. 어떤 이는 온실 속 좋은 토양에 심겼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바위틈에 피어나는 꽃처럼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심겼을 수 있다. 심긴 곳은 모두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 심겼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게 아닐까 싶다. 남들과 비교해 불평하기보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감사함으로 꽃을 피울 때, 하나님은 잠시 시선을 멈추시고, “너 참 기특하다, 애썼다.” 하시지 않을까.
오늘 하루도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1).
송지혜 집사
겸손
기도원에서 한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던 목사님이셔서 늘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데 한 번은 인사를 드리자마자, “에녹아, 겸손해야 한다. 늘 겸손해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어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린 뒤 헤어졌습니다. 얼마 뒤, 이번에는 장로님 한 분이 지나가는 저를 세우시더니, “주의 종이 될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저 감사 인사를 드리고 다시 갈 길을 갔습니다.
제가 겸손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를 겸손하다 여겼던 제가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겸손에 대해 생각이 깊던 중 사전을 찾아보게 됐습니다. 겸손은 ‘겸손할 겸(謙)’에 ‘겸손할 손(遜)’으로, 그 뜻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입니다. 뜻을 알고 나니 제가 하나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겸손하다고 생각했던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남을 존중하지 않고 나를 드러내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에게 두 번이나 그런 말씀을 들려주셨는지 깨닫게 되며 그동안 교만한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내가 아직 덜 익어서, 익어가는 중이어서 머리가 서 있나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삶 속에 주어지는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중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나도 완전히 익어 고개를 숙이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말입니다(엡4:13, 약1:4, 롬12:16).
윤에녹 생도
과정이 좋아야 한다
세상은 어떤 일의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한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열광하다가도, 그 과정의 불합리성이 드러나면 등 돌리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이 불법이었어도 그 과정과는 무관한 일인가? 무법의 세상에서는 눈속임이 가능해도 법치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도 법치주의이기에, 과정의 합법성 여부를 마지막 때 공의롭게 평가하신다(마7:21~23).
예수를 믿는 시작은 좁은 문으로 시작해, 협착한 길을 걸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출발도 오직 예수 한 분이라는 좁은 문으로 시작하고, 과정에서도 그 법을 따르고 사는 좁은 길이다. 이 과정이 좋아야 그 끝이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도둑질해서 도둑놈이 아니라 도둑놈이기 때문에 도둑질하는 거다!”라고 하셨듯이, 과정 자체가 여전히 도둑놈의 본질이니 거기서 나온 열매도 부당한 열매다. 도둑놈이라는 과정의 변화가 없이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도 신뢰를 잃게 된다. 어떻게 ‘현재’라는 과정을 건너뛰고 좋은 미래를 기대하며, 불법의 과정으로 선한 결과를 기대하는가? 구원의 벼락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절차적 과정이 적법해야 한다. 날마다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야 한다(엡2:22).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의 시간을 ‘영원한 현재’라 한다. 늘 현재의 예수님이시다. 그러니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모든 시간 가운데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예수님을 모방한 짝퉁인 적그리스도는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다(계17:8). 마귀는 현재라는 과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한다. 온갖 편법과 술수로 미래를 얻어내게 한다.
우리 교단의 핵심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이다. 화석화된 과거 예수의 역사적 지식만 배우는 것도 아니요, 미래 희망 사항으로서의 비전만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예수님을 지금 영적으로 체험하고 배우는 교단이다. 천국 가는 ‘과정으로서의 현재적’ 삶을 중히 여긴다.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의 공의와 법치가, 신앙생활이라는 사적인 영역과 국가와 사회 모든 공적 영역 속에서도 빠짐없이 성취되길 바란다.
송직화 목사
나의 피난처 예수
시편에는 ‘피난처’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사전적으로 ‘피난처’는 ‘근심, 고통, 위험에서 피할 장소나 대상’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물리적 위험뿐 아니라 마음의 근심과 고통을 피할 피난처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시시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62:8)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마음의 피난처로 삼고 있나요?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쁨을 얻고, 또 어떤 사람은 잠을 통해 위안을 얻습니다. 술이나 흡연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도 있고, 게임이나 영화에 몰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노래를 듣거나 유튜브, 인스타그램, 뉴스 등을 보며 마음을 달래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며 기쁨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때 문제가 됩니다.
저는 작년 말,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끊어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21일 동안 기분을 좌우하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즐겨 먹던 간식도, 커피도 이 기간에는 전부 끊었습니다. 그때 분명하게 느낀 한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맛있는 음식이 먼저 떠올랐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기로 한 이후로 기도 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마음의 짐을 주님께 맡기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더불어 기도 응답의 기쁨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식었다면, 나는 무엇을 피난처로 삼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시시한 것에서 기쁨을 찾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우리를 얽매는 족쇄가 됩니다. 처음은 내 의지로 한 선택이지만 나중에는 쉽게 끊어낼 수 없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삶은 기쁨과 참 자유가 있습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때 ‘재앙과 환난에서 건지며 간구에 응답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5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 전대미문의 축복을 받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전소희
so2eej@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