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사랑
성경은 말씀하신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딤후2:4).
주님이 왜 이렇게까지 모질게 말씀하셨을까? 그 답은 다음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10:16). 주님은 영적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또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아시기에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전쟁에 2등은 없다. 승자와 패자만 있고, 패자는 승자의 종이 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전쟁에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데리고 나간다면 같이 죽기로 작정한 것 아니겠나. 전쟁에는 연합하여 싸워줄 사람과 나가야 한다.
해외집회에 나갈 때면 몇몇 분이 나에게 이번에 자기 아들을, 자기 딸을 데리고 가달라고 한다. 목사님과 동행하며 견문을 넓히게 해달란다. 더는 거기에 사는 자기 딸이나 아들에게 물건을 전해줍사 한다. 답답하다. 내가 관광하러 38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게 아니다. 전쟁하러 간다. 그것도 치열한 영적 전쟁을 하러 간다. 그래서 나는 같이 싸워줄 사람이 아니면 절대 동행하지 않고, 어떤 요구사항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냉정한 것이 아니라 대사를 앞두고 냉철해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도 많은 사람들과 동행했었다. 그런데 내 참모들이 그들을 챙기고 돌보느라 정작 해야 할 일들을 못하는 것을 보고는 단호하게 선교팀을 재구성했다.
사업도 그렇다. 함께 일할 자를 사업 동료로 구성해야지, 내가 도와줄 자를 쓰면 안 된다. 괜히 인정이요, 혈연이요, 학연이요 하며 그들을 쓰다가는 속히 망한다. 그들은 사업이 잘된 후에 도와주면 된다. 따로 살길을 마련해주면 된다.
‘정 때문에’, ‘차마 말을 못해서’, ‘차마 잘라내지 못해서’ 대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일과 정, 일과 사랑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멸을 벗어나 공생하는 길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