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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울타리

1170호 · 2022-10-09
오늘의 메시지

말씀의 울타리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의 행동 반응을 실험하기 위해 학교의 울타리를 철거하였다. 그런데 울타리가 있을 때는 학생들이 운동장 전체를 사용하며 마음껏 뛰어놀았는데, 울타리가 없어지고 나니 운동장 갓 쪽으로는 가지도 않고 중앙에서 옹기종기 모여 놀며 행동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이 실험으로 울타리는 학생들에게 구속이나 억압이 아닌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울타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곧 말씀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살며 그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권면한다(잠7:1~2).

여기 ‘지킨다’는 단어는 ‘울타리를 치다’, ‘지켜 보호하다’는 의미가 있다. 말씀의 울타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며 참 자유를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양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시고, 친히 양의 문이 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양으로 구원과 함께, 들며 날며 꼴을 얻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한다고 하신다(요10:1~10). 다윗 또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며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만 신뢰하고 머물러 있을 때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이 있다.

참 목자 되신 예수 안에 거하길 힘쓰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신다(시23:4).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13:13).

김상욱 목사
낮은 울타리

진실한 신앙

얼마 전부터 서울 대학부에서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부흥하려면 새벽기도를 해야 해!’라고 외치신 총회장 목사님의 말씀을 붙잡고 전도사님께서 시작하신 새벽기도였습니다. 저는 이번 새벽기도로 교단의 부흥은 물론이고 제 스스로의 영적 부흥도 이뤄 신앙이 성장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부흥이라는 단어의 뜻은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입니다. 이 부흥을 위해 저는 제가 영적으로 놓치고 있던 것들,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 가운데 하나님은 저에게 ‘진실된 신앙’을 회복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진실된 신앙’이라는 말이 참 모호하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할 건데, 도대체 진실된 신앙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저에게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진짜 나만 바라보는 너의 참된 모습이야.’

내가 주님만 바라본다고 하면서 그러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나 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런 순간들이 꽤 떠올랐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이 있던 순간들, 예배하는 기쁨보다 다른 기쁨을 더 사모했던 순간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더 바랬던 순간들, 하나님이 아닌 내 삶이 더 드러나길 원했던 순간들 말입니다. 진실된 신앙이란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정말 주님만 바라는 진실된 나의 마음인데, 다른 것에 마음이 뺏기고 잿밥에 관심을 가지며 입술로는 주님만 원한다고 고백했던 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끼리 놀이동산이나 사람이 많은 곳을 가면 저는 이리저리 둘러보기 바빴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엄마는 종종 ‘수정아, 손 꽉 잡아. 잘 따라오고 있지? 엄마 잘 보고 와야 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응, 잘 보고 가고 있어.’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말만 그렇지 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아주머니를 따라간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주님과 어떻게 걷고 계십니까? ‘나만 보며 잘 따라오고 있냐?’는 주님의 질문에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된 답변은 무엇입니까?

장수정

부르심의 소망

돈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일제 식민지 시절, 한 부둣가에서 어린 소년이 어머니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일본사람뿐이라는 생각에 ‘한 푼 줍쇼.’라는 말을 일본어로 배우고, 일본사람에게 동냥하다가 우체국장 하야가와를 만나게 됩니다.

하야가와는 소년의 영특함에 반해 우체국으로 데려와 잔심부름을 시키며 사환으로 거두고 지속적으로 소년의 가족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하야가와는 소년을 일본정보학교로 보냈고, 소년 역시 하야가와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우수한 정보원으로 성장한 소년은 일본을 위해 일하게 되는데,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군의 은신처를 모조리 찾아내며 독립군과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 대량 학살하는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조정래 작가의 중 경신참변(1920년)을 다룬 것으로, 이 비극 속에서 돈의 중요한 특성을 발견했습니다.

돈에는 그 주인된 자의 마음과 의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조선인을 말살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일본사람의 돈으로 성장한 소년은 그 목적대로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만약 이 충성스런 소년이 하나님의 사람의 돈으로 성장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든지, 내가 돈의 노예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나는 돈의 주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16)고 외치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을 시인하며 십일조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물질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일지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온전히 주인된 자는 돈에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돈은 충성된 하인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정확히 쓰여지게 되고,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조선 말기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병원과 학교를 짓고 배고픈 조선인들에게 빵을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했고 이후 회개가 불일 듯 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돈의 특성 때문에 저는 돈에 대한 훈련만큼은 철저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돈이 제 통장에 있는 전부였을 때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빈 통장을 보니 불안해졌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실은 돈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 또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제가 가진 돈 전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저의 결심을 훈련하신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한을 늦추지 않고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막대한 양의 돈이 북한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들은 각각 제 주인의 의지를 담은 채 그 주인의 뜻대로 쓰여지겠지요.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거나 혹은 영혼을 죽이고 또다시 노예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돈들이 더 많이 북한에 들어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김일성 우상체제에 속아, 갇히고 포로된 북한 사람들이 진정 자유케 되길 소망합니다.

꿈꾸듯 그날이 올 테니 어서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돈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이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영신

rubyday0@naver.com

신앙에세이

노력이 필요해요

야근을 하거나 저녁에 누굴 만났다가 집에 들어가야 할 때 아내에게 말하면 다 이해를 해준다. 그런데 막상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아내의 표정과 말투가 퉁명스러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해하는 것과 힘든 것은 별개라는 것을.

최근 아내와 사소한 일로 갈등이 있었고, 또 예민한 첫째 아이와 막무가내인 둘째 아이를 대하는 것이 요즘 좀 어려웠다. 안 되겠다 싶어 유튜브로 이쪽 분야에 전문가의 강연을 듣기 시작했는데, 전문가는 생각과 감정은 다르다고 했다. 우리의 감정은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 반응하는데, 상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그 감정을 수용해주고, 또 그렇게 반응하는 상대의 기질을 인정해주면, 갈등이 최소화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강연에서는 가족끼리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예의와 예쁘게 말하려는 노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들은 대로 행동에 옮겨보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예민한 성향의 첫째 아이는 그 기질을 인정해주고 최대한 내 표정과 말투에 신경을 썼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했을 때 격하게 떼를 부리는 둘째 아이는 그 감정을 수용해주고, 감정이 다스려질 때까지 기다려주며 견뎌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계속해서 노력하니 아이들과의 관계가 점점 좋아지고 이제는 아빠를 매우 좋아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안다.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 감정에만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상대의 감정을 수용하고, 인내함으로 기다리고 견디는 노력.

바로 주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노력 말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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