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라(잠17:14)
지난 수요예배 때 저는 탄산수와 생수, 자갈과 옥토를 비유로 싸우지 말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며 그 영상을 다시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가정에서, 기업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다툼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정치인 간의 다툼, 노사간의 다툼, 부부간의 갈등과 싸움,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다툼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투면 안 됩니다. 싸워서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선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다툼이 일어날 때, 갈등이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싸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육축과 금은이 많았습니다. 조카인 롯도 상당한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늘어난 재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시작됩니다. 한정된 땅에서 많은 가축을 기르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를 놓고 싸움을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러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될 것을 아는지라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8~9).
아브라함의 제안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다투지 않기 위해 갈라서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현명한 방법입니다. 싸우면서 굳이 같이 살고, 서로 으르릉거리면서도 함께 사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가정이나 기업이 잘 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17:14)고 하셨거든요. 물이 조금씩 샐 때 막아야지, 방축이 무너지면 정말 큰일 납니다. 얼마 전에 파키스탄에 대홍수가 났습니다. 국토의 1/3이 잠길 정도로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피해를 초래한 이유는 댐과 제방들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댐이나 제방시설이 무너지니까 사람도, 재산도 남김없이 다 휩쓸어갑디다. 싸움도 그렇습니다. 싸움하다 사람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러서 다 잃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전에 갈라서는 것이 낫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처럼요.
아브라함은 그 후에도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과 사라를 통해 얻은 이삭과의 다툼이 잦자 그 둘을 갈라놓았습니다. 또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참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쌍둥이인 야곱과 에서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 늘 마음에 쓰였습니다. 더욱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사건과 더불어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얼른 야곱을 친정으로 피신시켜 에서와 갈라놨습니다. 그래서 대참사를 막았습니다. 그대로 방치했더라면 가인과 아벨 짝이 났을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믿음의 거장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심히 다툽니다. 이유인즉 바울은 마가가 1차 선교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간 사람이니 미덥지 않다, 그러니 이번에는 데려갈 수 없다 하고,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 하여 견해차가 심했습니다. 이 문제로 서로 다투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아주 잘한 겁니다. 만일 싸우면서 같이 있었더라면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실패작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행15:36~41).
성경에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19)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부부 문제에는 노터치하겠습니다. 단지 이 말씀을 ‘다투며 같이 일하느니, 같이 사업하느니, 같이 목회하느니 갈라서는 게 낫다’라고 확대해서 해석합니다. 실제로 우리 지교회에서도 목사와 성도가 갈등할 때 서로 갈라서 교회를 하나 더 세웠더니 이 교회도 잘 되고, 저 교회도 잘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럼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나 가정이나 동네가 어찌 바로 서겠습니까(마12:25).
둘째, 아브라함은 싸우지 않기 위해 양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줬습니다. 당연히 롯은 보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지라, 이삭도 양보를 잘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6장에는 우물을 파는 이삭에 대해 나옵니다. 이삭이 그랄에 머무르면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서 샘이 나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며 ‘이 우물은 우리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그랄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고 순순히 우물을 양보했습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또 다툼이 나자 그 우물도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옮겨 ‘르호봇’이라는 우물을 팠으니, 이는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는 뜻으로 축복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다투지 않은 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싸우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콜라 같은 탄산수는 조금만 흔들어도 퍽 하고 터져 다 쏟아져 버립니다. 그러나 생수는 많이 흔들어도 언제나 그대로이지요. 이것에 합당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2장 16절에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언 29장 11절에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유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생수 같은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자갈을 빼내면 옥토가 되듯 그 안에 혈기라는 자갈을 빼낸 사람입니다. 혈기가 많은 사람은 조그마한 일에도 욱하며 덤빕니다. 싸움닭이나 투견처럼 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5).
온유한 자가 받을 복이 많지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37:11).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3:2).
여러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쳐야지요. 사후약방문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살다보면 화나는 일도, 싸울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를 다스리는 자가 이기는 자이고, 복 받을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고 하십니다.
지혜가 제일입니다(잠4:7). 지혜를 가르쳐드릴까요? 대화하다가, 어떤 일을 하다가 화가 나고, 이것이 다툼으로 발전될 소지가 있걸랑 얼른 그 자리를 피하세요. 또 화를 잘 내는 자와는 애당초 동행하지 마세요. 같이 있다 보면 닮게 되거든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잠22:24~25).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자가 됩시다. 그러면 절대 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목사들도 성도를 온유함으로 대해야 하고, 권면할 때도 온유함으로 하세요(딤후2:24~25). 아내들도 그 행위를 보고 안 믿는 남편이 ‘나도 우리 마누라 믿는 예수를 믿어볼까?’라고 할 수 있게끔 온유함으로 가정을 이끄세요(벧전3:1~4). 그러면 싸움 대신 웃음과 행복이 가정에, 기업에, 교회에, 국가에 넘칠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개미가 낸 작은 구멍이
큰 댐을 무너뜨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