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얼굴을 뒤덮기 시작했던 여드름은 청소년기 시절 저의 최대 고민거리였습니다. 울긋불긋, 울퉁불퉁했던 얼굴이 창피해서 되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기 일쑤였지요.
타고난 피부 미인인 엄마를 닮지 않고 젊은 시절에 여드름쟁이였던 아빠를 닮아 내가 이렇게 된 거라며 억울함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자답게 생긴 아버지의 얼굴형까지 닮았던 저를 보신 총회장 목사님께서, ‘진실이가 계란 홀랑 벗겨진 것처럼 되게 해주세요.’ 하고 손으로 제 얼굴을 그리면서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듣게 된 건 스무 살이 된 이후였습니다.
“성형하지 않고서야 가능하겠어?”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여드름에, 여전히 넙데데한 제 얼굴을 보며 저도 자포자기했으니깐요. 처음으로 고백하는 사실이지만 제 나이 21살에 실제로 성형 수술을 받겠다며 병원을 찾아갔었습니다. 수술 날짜를 잡고 집에 돌아와 두려운 마음에 기도하는 중,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는 말씀이 생각나서 다음 날 예약을 취소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각이 납니다.
“너는 안돼도 나는 돼!” 20년 전에도 동일하게 외치셨던 목사님은 믿음이 연약한 저를 보실 때마다 ‘계란 홀랑’을 주입시켜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저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멀리서 봐도 이마에서 광이 나요.” “여드름이 있었다구요? 안 믿기는데요?”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된다고 38년을 외쳐오신 총회장 목사님의 믿음으로 저는 정말 ‘계란 홀랑’ 벗겨진 것처럼 환골탈태하여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유전’이라는 보편적 지식의 틀에 갇혀 평생 여드름 많은 넙데데한 얼굴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현실의 제 얼굴을 받아드리지 않으시고 십수 년간 멋진 얼굴이 될 것을 상상하며 기도하셨기에, 오늘날 제가 기적을 맛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목사님처럼 고착된 사고의 틀을 깨고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봅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감사함으로, 고난으로 받는 복
칭기즈칸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벽돌집에 사는 것’은 정착한다는 의미이고, 곧 말타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허벅지에 살이 찌고, 배부른 기름 맛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원정길을 포기하고 음주 가무에 빠져들 것을 경계한 것이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까? 성경은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2~14)고 말씀하신다.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만든다. 사람이 성공하거나 잘살게 되면 교만에 빠지기 쉬워진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솔로몬은 세상의 그 어떤 왕보다도 부유하고 슬기로운 왕이었다. 하지만 그도 말년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물질과 군사를 과시하며 향락과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은 아들 대에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말았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신8:19)
지금 인생이 잘 풀리고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광야를 지나고 있다면 낮추고 시험하시지만 결국에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하자.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6).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김성일 집사
최후의 사람
‘최초로 전기를 상용화한 인물’ 발명왕 에디슨, ‘최초로 중력의 개념을 확립한 인물’ 위대한 물리학자 뉴턴…. 회사에서 어떤 제품을 출시할 때도 ‘최초’라는 사실을 홍보합니다. ‘최초’라는 말에는 혁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당연하게 항상 ‘가장 먼저’하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취업에 성공하는 것도, 승진을 하는 것도, 남들보다 빨리하면 그게 참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할 때가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잘하고 싶고, 먼저 하고 싶고,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마음에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가장 먼저 좋아했고, 하나님을 누가 가장 먼저 따랐는지에는 집중하지 않으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는 사울을 보고 다윗에게로 시선을 옮겨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시작만 볼 때 사울은 왕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비참했지요.
베드로는 처음에 하나님을 부인한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마지막까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시작보다 끝이 중요합니다. 죽는 날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시작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으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최초’라는 타이틀에 주목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라도 끝까지 하나님 곁에 있는 ‘최후의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 말씀처럼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어야지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시작이 빠르다고, 시작이 좋았다고 해서 절대 그리스도 안에 참예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할 때도, 이웃을 섬길 때도, 직분을 감당할 때도 우리 모두 끝까지 첫 마음 가지고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고 승리하는 ‘최후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장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