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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봄이 오는 것을 겨울이 막을 수 없다(요14:10~14)

1137호 · 2022-02-20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목회를 시작하기 전 평신도이던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왜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셨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마28:18~20)라는 말씀을 이루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최고의 연장을 줄 테니 나보다 큰일을 해봐. 최고의 무기를 줄 테니 마음껏 해봐.’ 하신 것입니다.

해외집회를 할 때면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입니다. 2중, 3중으로 통역을 해야 하고, 또 예수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구교의 습성에 젖어 있거나 교회는 다니지만 심령이 냉랭한 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떻게 집회를 성공하는 줄 압니까? 그들에게 먼저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확 달라집니다. 눈이 동그래지고, 귀가 쫑긋해집니다. 그리고 닫혔던 마음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저런 역사가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밭이 잘 갈아졌을 때 저는 말합니다. “영상으로 본 것과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 일어나도록 회개하고 통성기도 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소리를 높여 기도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곳에 역사하시지요. 귀신이 떠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요, 많은 설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2001년 칠레집회를 여러분도 보셔서 알겠지만, 제가 설교를 길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고,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것이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충분히 목도했기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곧 데리러 오십니다.”라고 전도하다가 “예수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어요? 믿게 해보세요.”라고 상대가 말하면 멈칫, 쭈뼛하는 주의 종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못 보여주니까. 영이신 하나님을 어찌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아닙니다.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실 주의 종들이 설교는 너무 잘하는데, 신학적인 논리는 완벽한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사 말을 안 믿는 겁니다. 의사는 의술로 의학을 보여주고, 과학자는 실험을 통해 과학을 증명하는데,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니 목사 말에는 콧방귀를 뀌는 겁니다.

사람들은 봐야 믿습니다. 증명이 되어야 인정하고 수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고 말씀하시고 몸소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자고로 시각적인 감동이 청각적인 감동을 앞서는 것입니다. 라디오로 소리만 듣는 것보다 텔레비전을 통해 눈으로 확인하면 더 신뢰가 가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줍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래도 안 믿기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행하신

‘그 일’, 곧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 기사와 표적을 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예수 이름으로 땅을 축복하니 그 땅이 복을 받고, 의사가 손을 뗀 병을 예수 이름으로 안수하니 병이 낫고, 가난한 자를 축복하니 부유케 되는 것을 본 자들이 스스로들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바로 21세기 목회에 성공하려면 ‘보여주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줘야 합니다. 요즘은 증거가 필요하고, 증명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권능을 장착해야 하는데, 이는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빌립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14:11)고 하셨습니다. 도토리 안에 참나무가 있고, 사과씨 안에 사과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0문도에게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고, 12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낼 때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마10:1). ‘그 일’은 예수의 제자들이나 사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성령충만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 더욱이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성령충만을 입는 길, 성령을 소멸치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을 봅시다. 여기에는 귀신들려 물과 불에 자주 넘어지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를 제자들이 어찌하지 못하고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치자 상심에 찬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저는 제자들에게 ‘목회는 무릎으로 하는 거다. 괜히 이 신학 공부, 저 신학 공부해서 머리만 커지지 말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늘 말합니다. 학문에 뛰어났던 바울도 세상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겨 버리고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고 고백했습니다. 신학적으로 해보니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신학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성령충만을 입게 되고, 성령 충만해야 권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아야하니까요.

기도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잃지 않고, 성령 충만해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나타나며, 그 권능으로 세상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행1:8). 사도행전 4장 16절에도 “저희(베드로와 요한)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행4:16)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주의 종들이 이 원리를 모를 리 없습니다만, 기도가 힘드니까 안 해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 4시간 내지는 7시간 기도는 사실 힘듭니다. 그러나 내가 불이 붙어야 남을 붙일 수 있고, 내가 실력이 있어야 남을 가르칠 수 있고, 내가 능력이 있어야 남을 살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힘들어도 해야지요. 예수님도 종일 능력을 행하시고 철야기도, 새벽기도를 하셨는데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받은 연장이 녹슬고 맙니다. 기도로 그것을 갈아야 언제든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10:10).

엄동설한이 길어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곧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권능으로 무장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가야할 때입니다. 물론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우리의 주목적은 아닙니다. 기사와 표적을 보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천국이 있음을, 그 천국은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갈 수 없음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 모두 성령으로 전신갑주를 입읍시다. 할렐루야!

도토리 속에 참나무 있고

사과씨 안에 사과나무 있다

청각적인 감동보다

시각적인 감동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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