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히10:35~39)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5~9)
이는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초석아,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이 말씀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봅니다. 눈 덮인 산야, 물 없는 사막에 비유하는 목회 37년이란 세월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떠한 위협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욱 담대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담대함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는 구석이 있으면 담대합니다. 예수 믿기 전, 저는 거의 매일 친구들이나 거래처 사람들과 술자리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술을 마실 때는 호탕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파할 때면 괜히 신발 끈을 오래 매거나 화장실이 급하다고 먼저 나가곤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그야 술값을 내지 않으려고 그랬지요. 돈이 없으니 담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계산서를 손에 들고 당당히 계산을 했습니다. 제 주머니에 돈이 두둑했었거든요. 돈이 저를 담대하게 만든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도 담대합디다. 그러나 돈은 있다가도 없고, 권불십년(權不十年)인지라 권력도 영원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시146:3).
우리의 담대함은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요,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오래전 대전에서 집회를 할 때입니다. 집회 장소로 기독교연합회관을 계약했는데, 아마 대전 기독교 측에서 딴죽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집회장소를 빌려줄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입니까? 그래서 계약 파기에 따른 이의를 제기했더니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집회 장소를 쓰쇼. 그러나 전기는 끊겠소.” 그래서 제가 “베니스의 상인도 못 읽어봤는가? 전기를 끊는 건 좋다. 그러나 불은 들어오게 해라.”라고 쩌렁쩌렁한 소리로 응수했더니 그들은 군소리 못하고 장소를 내주었습니다. 제가 뭘 믿고 그렇게 소리쳤을까요? 바로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1991년, 올림픽공원 사이클 경기장에서의 일입니다. 그날 태양은 왜 그리 내리쬐는지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태양을 마주보고 설교를 해야 하는 저는 눈조차 바로 뜰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통성기도를 시키고 하늘을 보니 조각구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구름아, 태양을 가릴지어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구름은 태양을 가려라.” 어디서 그런 담력이 솟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작은 구름이 이동하며 점점 커지더니 딱 태양을 가린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의 탄성과 감사가 귀에 쟁쟁합니다. 만일 제가 ‘명령해도 안 될지 몰라’ 하고 두려워 떨었더라면 절대 그와 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뙤약볕 아래서 예배를 드리느라 고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믿음이 저를 담대하게 했습니다.
2003년 슬라바 목사와 저는 키르기스스탄 집회 때 KGB에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던 바로 그곳 말입니다. 슬라바 목사와 저는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한참을 대기했습니다. 그러나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KGB 요원을 만났을 때 저는 담대하게 “할렐루야!” 하고 악수를 청했고, 슬라바 목사는 러시아어로 “이 목사님은 세계 72개국에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다. 이 목사님을 건드리면 세계가 당신 나라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저와 슬라바 목사의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118:6).
이런 경험들이 하나둘씩 쌓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어떤 상황이 와도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무찌른 경험이 있었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담대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지요? 그렇다면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강을 건널 때에 물이 우리를 침몰치 못하게 지키시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지키신 하나님이 우리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하게 하실 것이요, 불꽃이 우리를 사르지도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사43:2).
다니엘이 담대할 수 있었던 것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다윗이 담대했던 것도, 사도 바울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도, 기드온의 300명 용사로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당신이 두려워 떠는 것은 성령 충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미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매사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어린 계집 앞에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겁쟁이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니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죽을 수 있는 용감한 사도가 되었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도 성령을 받은 후에 성령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치고 세상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겁니다. 마귀는 영적 정전사태를 만들어 우리의 삶을 깜깜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에 놀라고 두렵게 하여 마침내는 우리를 공포에 질려 죽게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불만 켜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의 불, 곧 성령의 불만 밝히면 어두움의 주관자인 악한 마귀는 도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에 충만하면 담대하게 되어 악한 것들을 내어 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연단하여 더욱 담대한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두려움에 눌려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고로 대를 이을 자식은 강하게 키우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믿고 담대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개도 두려워하면 뭅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나가면 깨갱거리고 꼬리를 내립니다.
당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자 무서워 난리를 치며 주무시던 주님을 깨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늘 당신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담대하십시오. 할렐루야!
두려움은
삶의 암적 존재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