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유분방한 태도 때문에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하고 직장을 자주 옮긴다. 이런 사람은 ‘자기는 하고 싶은 말은 누구 앞에서라도 한다’고 자랑하지만, 이런 이유로 직장 상사와 관계가 틀어지니까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탁구 라켓 대신 칫솔 뒷면으로 탁구를 치는 국가대표 선수와 같다. 라켓을 내 맘대로 휘두르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탁구공을 보내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는 내 맘대로 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꾸준한 훈련과 집중력을 가지고 노력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도전했다. 범죄 후 그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는 단절되고 수치심의 노예, 열등의식의 노예,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마귀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라고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고 말한다. 여기서 ‘복’은 ‘유익(benefit)’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가 되도록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고 자유를 누리도록 율법을 주신 것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법이 대한민국 사람들을 보호하듯 율법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의지적으로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법안에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이정금 전도사
“그럴 수 있지”
수영장에 다니면서 동네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나는 30대, 다른 두 명은 20대와 40대였다. 우리는 세대를 초월(?)하는 우정을 쌓으며 잘 지내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나에게 “너는 왜 맨날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하니?”라며 화를 냈다. 그 뒤로 우리 관계는 다소 소원해졌다.
얼마 전, SNS에서 지인의 피드를 보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지인에게는 딸이 두 명인데, 첫째는 예쁘고 건강한 초등 2년생, 둘째는 느리게 크는 지적장애 5살 아이였다. 큰딸 아이의 친구들이 집에서 놀다가 한 친구가 “너희 동생은 왜 기어 다녀? 아기 같아.”라고 말하니, 큰딸 아이가 “내 동생은 느리게 크는 아이야.”라고 대답했단다. 물어본 친구가 “왜 느리게 커?”라고 다시 묻자, 그 대화를 듣던 다른 친구의 말, “그럴 수도 있지.”
그 지인은 딸보다 조금은 성숙해 보이는 그 친구의 말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소회를 남겼다. 그 글을 본 뒤로 내 입과 머릿속에서 꽤 오랜 시간 그 말이 맴돌았다. “그럴 수도 있지.”
이 말은 많은 것들을 유연하게 만든다. “너는 왜 나와 생각이 달라?”, “너는 왜 일을 그렇게 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독단적이야?”, “저 사람은 왜 애를 저렇게 키워?” 등등. 누군가를 재단하고 비난하고 판단하는 모든 말들은 “그럴 수도 있지.” 이 말 한마디면 끝이다.
그렇다. 모든 일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땅에는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사람들의 각기 다른 생김새처럼 우리의 생각과 행동도 다 다르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품어 안는 일은 매우 어려운 법이다. 그것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
우리는 저마다의 주관과 상식이 있다. 그래서 서로를 보듬어 안기 위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해 보자. “그럴 수도 있지 뭐.” 이 말은 나의 상식이 아닌 상대방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이해와 용서와 사랑의 폭이 넓어진다.
전훈지 집사
겨자씨만 한 믿음이 무엇일까?
20세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약 10년 만인 BC 333년에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한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과 당시 적군이었던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와의 최후의 결전을 배경으로 전해 내려오는 일화입니다.
다리우스는 결전을 앞두고 알렉산더에게 선전포고하며 보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참깨였습니다. ‘페르시아 군대는 참깨처럼 셀 수 없이 많으니 승산 없는 싸움을 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뜻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답장으로 작은 봉투 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서 다리우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고 전쟁의 승리는 알렉산더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보낸 선물은 바로 작은 겨자씨 하나였고 이 선물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수가 적다고 무시하지 말라! 이 겨자씨처럼 작지만 무섭고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린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겨자씨의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이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는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의 유채꽃처럼 3월이 되면 이스라엘의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꽃이 바로 겨자 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땅에 떨어져 싹이 나면 이듬해 그 지역이 온통 노랗게 변할 만큼 놀라운 생명력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89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어전쟁에 참전 중인 한 영국 장교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하지만 수용소 벽을 뚫고 탈출했으며 남아공 내의 영국인 이주자의 도움으로 위험지역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중립지대인 포르투갈령 모잠비크까지 무려 480km를 걸어서 탈출에 완전히 성공합니다.
이 장교는 어린 시절 말더듬이였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서고 어느 정도 철이 들 무렵 이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집중력을 길렀고, 오랜 시간 노력하여 말더듬는 습관도 극복했습니다.
청년이 되고 꿈에 그리던 군인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말더듬이뿐만 아니라 집중력까지 약하던 그는 성적이 좋지 않아 사관학교에 2번이나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고 3번째는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인생의 많은 부문에서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를 관철한 이 사람은 영국의 61대, 63대 총리를 역임한 ‘윈스턴 처칠’입니다. 처칠 또한 겨자씨의 비밀과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해진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처칠이 2차 대전 당시 옥스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할 때였습니다. 처칠은 청중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힘 있는 목소리로 짧은 한 문장을 외쳤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연설이 끝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청중에게 한참 뒤 그는 소리를 높여 다시 외쳤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어리둥절해하는 청중들에게 처칠은 다시 소리쳤습니다.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때야 청중들은 처칠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힘들고 버겁고 눈물 나고 더 버티기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상황 앞에서 우리 예수중심교단의 성도들은 겨자씨의 믿음으로 간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시126:5~6)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작은 하나의 겨자씨를 믿음으로 땅에 심고 인내하며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그분이 예비하신 카이로스의 순간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겨자씨만한 믿음이 어떤 것이고,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원고 청탁을 받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성경 속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엇일까?’ 성령께서 내 마음에 말씀으로 응답주시기를 기도하며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를 한하는 자는 저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저희 시대는 영원히 계속하리라”(시81:15)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하나님께 복종하는 시늉만 할지라도 우리의 시대를 영원히 계속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모습만 보여도 우리의 시대를 견고하게 영원히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바로 겨자씨 믿음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은 무엇일까요? 잘못을 저지른 자식이라 할지라도 “나 밥 안 먹어!, 나 집 나갈 거야!”라는 말입니다. 자식은 “나 밥 안 먹어! 나 집 나갈 거야!”라고 해도 박대하지 않고 품고 달래고 안아주고 용서하는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겨자씨 믿음입니다.
금식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온갖 수모와 수치를 겪으면서 피땀을 흘려 벌어온 돈으로 양식을 사고 집에 있는 자식의 입에 숟가락 들어가는 모습에 최고의 기쁨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울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말씀입니다. 기도하면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이적이 일어납니다. “네가 믿느냐? 하나님의 기적을 볼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보증수표입니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우리는 기도하기를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염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탕자처럼 허랑방탕하게 살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내 맘대로 육신과 정욕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고 게으르게 살면서 내 욕심을 좇아 내가 초래한 일인데 기도한다고 들어주실까?’ 하고 낙담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되어도 예전의 나로 되돌아갈 것을 하나님이 아시는데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며 지레 겁을 먹거나 자책하며 주저앉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3번 부인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부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디베리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고 고백하며 돌이켜 회심하여 천국의 열쇠를 가지게 된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어떤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살았든지 고난의 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실 줄 믿고 수많은 주홍빛 같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믿음이 겨자씨의 믿음입니다. 눈앞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작은 구름 한 조각을 보고 일곱 번 더 갔던 엘리야처럼 겨자씨 하나를 품고 새가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될 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말씀을 붙잡고 거짓말을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으로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이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겨자씨의 믿음으로 승리하는 예수중심교단 성도들의 견고하고 축복된 미래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우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메디스템 줄기세포센터)
대표원장 안계훈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