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 말라(마5:38~48)
토사구팽(兎死狗烹), 이는 토끼 사냥이 끝나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가 필요 없게 되어 주인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달면 삼키고 쓰면 토한다’는 뜻의 감탄고토(甘呑苦吐)와 같은 뜻입니다.
토사구팽은 현재 정치나 비즈니스 세계나 인간관계에서 만연하고 있습니다. 필요할 땐 쓰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냉정하게 버리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 끝에는 복수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토끼야 죽으면 끝이지만, 토사구팽 당한 사람은 가만있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지목하니 모세가 자신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해서 손사래 치며 거절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함을 나타내기 위해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내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잘 쓰다가 필요 없다고 내치는 순간, 그 사람이 뱀이 되어 나를 물어버립니다. 요즘 연인들이 헤어지면 원수가 되어 상대와 가족을 괴롭히고, 집에 불을 지르고, 심지어 죽이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팔 가룟 유다를 건지기 위해 애쓰셨던 것처럼,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수제자 삼은 것처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사람을 버릴까요? 은혜를 잊기 때문입니다. 물 한 컵을 떠줘도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건만, 자신을 취직시켜준 사람, 창업할 때 함께 고생한 사람, 개척할 때 함께 했던 성도들, 단칸방에서 함께 고생하던 아내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내치는 겁니다. 요즘 여자 측에서 황혼이혼을 요청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내들이 이제 살만 하니까 돈 못 버는 남편 삼시세끼 밥해주기 귀찮아 그런 겁니다. 맘대로 살고 싶은 거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죽어라 젊어서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린 남편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왕인 사울이 어떻게든 감당해야 할 문제를 어린 다윗이 단숨에 해결해준 것입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요. 처음에는 사울도 감사해서 그를 사위 삼았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자 시기심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는 사울의 자살로 마감되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17:13).
그러나 다윗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은혜를 알기에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그는 손대지 않았고, 친형제 이상이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죽자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생존해있음을 알고는 그의 할아버지가 소유했던 땅을 돌려주고, 자기 상에서 같이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삼하9:7). 또한 아들 압살롬으로 인해 피난길에 있을 때 자기에게 식량을 지원해준 바실래라는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아 그의 아들을 나중까지 챙겨주었습니다. 다윗은 죽을 때 아들 솔로몬에게 바실래를 잊지 말라고 당부까지 합니다(왕상2:7).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함구하고 옥으로 향했던 것은, 그간 자기를 믿고 가정 총무로 써준 보디발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을 토사구팽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이구,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 그렇게 매달리더니 취직이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과 짝하지 않았습니까? 집 달라고 기도해서 하나님이 집을 주시니 이제는 아예 기도 안 하고 편안하게 그냥 사는 것…. 이것이 토사구팽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장가들어서’ 잔치에 못 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누가 줬는데요? 어려웠던 날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여 응답받아 복을 누리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새겨야 사람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팽(烹)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 오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토사구팽한 겁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입니다. 배은망덕하면 끝이 안 좋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에 근본은 ‘은혜’에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도(道)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대인배는 사람을 버리지 않고 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고후6:11~13).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번에는 손을 품었다가 내보이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했고, 그 손을 다시 품으니 그 손이 원상 복귀되었습니다. 사람을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좀 잘못을 했어도, 조금 못났어도,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쓰다 병에 걸렸어도 품을 줄 아는 거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화가 치민 그 사람은 돌을 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캐면 캘수록 돌더미는 너무 커져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이 한마디 던졌습니다. “돌을 캐지 말고 돌부리를 흙으로 덮게나.”
그럼요, 남의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사람, 남의 죄를 감춰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참고, 내가 불이익을 보더라도 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자신을 판 형제들을 용서하고 품었듯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품으셨듯이 그래야 합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윤회가 젊은 시절 시골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자 어느 집 뜰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인집 아이가 마당에 나와 커다란 진주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리니 옆에 있던 거위가 냉큼 삼켜버렸습니다. 얼마 후 주인은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결박 지어 아침이면 관가에 고발하려 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저 거위를 내 곁에 매어 달라’고만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구슬이 거위의 배변에서 나왔습니다. 이를 본 주인이 부끄러워 사죄하며 “어제는 어째서 말하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그 왈, “만일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거위 배를 갈라 구슬을 꺼냈을 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임금 귀에까지 들렸는데, 임금은 이런 자가 백성을 돌봐야 한다며 그에게 도승지라는 직분을 하사했습니다. 잠시의 욕을 참고 변명하지 않아 거위를 살린 윤회, 그런 마음이라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사람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하나 당부할 말은 일기를 쓰십시오. 일기를 쓰면 과거 그 사람의 공적, 그 사람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게 됩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모르드개가 왕을 살린 일을 왕이 뒤늦게 일기를 보면서 알게 되지 않습니까? 히스기야도 하나님 앞에 제가 한 행적을 기억하여 살려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기장에 우리의 행적이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일기를 씁니다. 가끔 일기를 보면서 ‘그 사람이 그때 그랬지.’ 하며 은혜를 곱씹습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열 명의 동지보다 한 명의 적을 두지 않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리에서 시작됩니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의리로 끝까지 지키는 자가 되십시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0). 할렐루야!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심비에 새겨라
열 명의 동지보다
한 명의 적을 두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