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1047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굳나잇!

1047호 · 2020-03-22
From Internet

어느 어머니가 임종을 맞게 되자 자식들이 다 모였다.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작별 키스를 했다. 엄마는 첫째와 둘째를 불러서 “이제 엄마에게 굳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고, “엄마, 굳나잇” 하며 두 아들이 인사를 했다. 그런데 셋째를 불러서는 “너는 엄마에게 굳바이 키스를 하렴.” 했다. 셋째는 왜 엄마가 형들에게는 굳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하고, 자기에게만 굳바이 키스를 해달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형들과는 곧 천국에서 만날 수 있지만, 너는 그동안 내가 그렇게 같이 교회에 가자고 해도 고집부리고 안 갔잖니. 예수님을 전해도 너는 전혀 믿지 않았어. 그러니 너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가 없으니까 굳바이 키스를 해달라고 하는 거야.” 그러자 셋째가 엄마 품에 안겨 펑펑 울며 말했다. “엄마, 저도 굳나잇 키스를 할래요. 저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갈 거예요. 엄마,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엄마는 셋째 얼굴에 입을 맞추며 ‘굳나잇’ 하고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누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별을 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누가 그 이치를 뒤집을까. 그러나 우리의 이별이 지나치게 슬프지 않은 것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 다시 볼 수 없음은 애석하고 그리움으로 남을 수 있지만, 다시 만남이 약속되어 있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지나친 슬픔을 자제할 수 있다.

그날이 되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예수님도 만나고, 앞서간 믿음의 동지도,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도 만나리라. 그래서 우리에게는 굿바이가 아닌 ‘굳나잇!’

예수중심편집실

한라에 핀 샤론의 꽃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상황이 이쯤 되니, 공포나 두려움이 ‘코로나19’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는 느낌이다. TV를 켜도, 신문을 봐도, 감염자가 줄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감염자 수는 물론 SNS가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준 덕에 몰라도 되는 정보까지 알게 되고. 거기에 이제는 택배 상자에 바이러스가 있다는 소문까지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특히 마스크 파동으로 수백 미터의 대기 줄을 만들고 그런데도 마스크 한 개조차 사지 못한 이들의 울분까지 6·25사변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고 했던 유행어가 현실이 된 요즘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로 일상이 마비되는 걸 보면서 문득 영화「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곤 이내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할 수 없는 한 연주자로부터 시작된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이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 ‘평화로움’을 가장 잘 보여주었던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 이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런 평안이 존재할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불안하고 두려운 이유는 아마 힘든 시간의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고 지나친 기우(杞憂)로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요즘 필자는 빌립보서 4장 4~7절 말씀을 매일 아침 출근길에 읊어댄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필자가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힘든 시기에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다. 늘 듣던 말씀이고 읽던 구절인데 그 당시 매일같이 읽고 또 읽다 빌립보서 4장 4절의 ‘주 안에서’라는 단어가 핵심이라는 것을 그때 첨 깨달았다. 내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내 환경에 대한 변화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눈앞에 보이는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불안과 두려움이 가시면서 마음이 평안해지고 뭔가 든든한 느낌은 나의 시선이 위기상황에 머물지 않고, 또 초라한 나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오직 이 땅을 창조하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에게로 향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평안은 주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참 평안은 풍랑 속에서 더욱 진귀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군대는 환난 속에서 남다르게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한다. 매일매일, 들이닥쳐서 막아낼 수 없는 나쁜 소식에 매몰되더라도 내 삶의 방향키와 이 나라의 방향키를 잡고 계신 분이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걸 믿고 신뢰한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현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빌4:7).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 바다가 거센 비바람과 부딪치니 성난 것처럼 파도가 높게 인다. 하지만 저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고요하고 잠잠하지 않을까.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얻고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이라는 이 위기가 재앙이 아니라 우리 일생의 비전을 품게 되는 기회로 삼길 소망해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Dr. 권정미

jmgood77@gmail.com

참된 깨달음

믿음의 신비한 힘

아프리카 드넓은 초원에 평온하게 풀을 뜯어 먹는 얼룩말이 있다. 언뜻 볼 때 평온해보이지만, 사실 이런 얼룩말은 늘 사자와 같은 아프리카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기 싶다. 그래서 평온하게 풀을 뜯다가도 갑자기 굶주린 맹수를 만나면 사력을 다해 도망가야 한다. 이때 얼룩말의 스트레스 지수는 급상승하고, 모든 장기들의 기능은 오직 ‘도망’과 ‘생존’에 집중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얼룩말은 언제 쫓겼냐는 듯 다시 평온하게 풀을 뜯는다. 왜 좀 더 일찍 도망치지 않았을까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또 앞으로 닥칠 위기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고 평안하게 풀을 뜯어먹는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 거대한 위기가 닥쳐올 때가 있다. 우리는 얼룩말과 같은 평정심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과민하게 반응하며 극도의 불안과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성경 전도서에 따르면 인생은 ‘형통’과 ‘곤고함’이라는 신비함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불안 심리로 외출을 자제하고, 철저한 위생관리 및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언제 누구로부터 감염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외부와 단절한 채 혼자 지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면 시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매 순간 형통과 곤고함은 늘 존재했다. 두려움은 알고 보면 참새를 속이려고 세워둔 허수아비 같은 무기력의 표본이다.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

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지만, 더 이상 내 힘과 능력과 근심과 염려로도 닿을 수 없는 부분은 믿음이라는 신비한 힘으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형통할 때도, 곤고할 때도 자신을 두려움에서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김정옥 전도사

1047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Text 주일설교
지혜의 말씀
Cartoon
붕우칼럼
선교지에서 보낸 편지
내가 매일 기쁘게
객원컬럼
성경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