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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타락과 원죄 (창세기 3:1~13)

1011호 · 2019-07-14
진리의 학당

하나님은 인자가 오실 길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으셨고(고전3:9), 인류 최초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의로 정하셨으니 그 언약 안에 들어오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창15:6~18).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믿음이 만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복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곧 생명이요(요6:63, 요12:49), 생령은 말씀, 곧 영으로 임한 명령을 받아 산다. 하나님의 영으로 명령을 받은 인간은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으나 만약 그 명령을 거역하면 죄가 되고, 그 죄는 생명을 영원히 상실한다. 육체는 자기의 날까지 임의로 살 수 있지만, 영은 결코 임의로 살지 못하니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의 영이 죽었고 그 영은 하나님 말씀의 생명을 상실했으므로 죄의 값을 피로 갚아야 하는 사망의 빚을 진 것이다(히9:22). 우리는 현실에서 귀신을 다룸으로써 사후의 영혼 존재에 대한 증험을 가진다.

뱀이 에덴에서 생명을 유린할 때, 하와가 먼저 범죄했지만 아담의 죄가 원죄가 되는 것은 아담은 생령의 근본이므로 그의 불순종의 범죄가 근원적 타락이 됨이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분리되어 나왔으므로 하나님이 되려 한 여자의 사탄적 범죄는 유전되지 않는 하와 자신의 자범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 이후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생령들에게는 아담의 불순종의 죄가 유전된 것이므로 영원한 피의 언약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원죄란 아담이 지은 죄요, 인류는 단일한 아담의 영과 그 죄를 유전한다. 호박이 넝쿨 벗듯이 아담이라는 영을 유전하는 인류는 모친의 태중에 죄인으로서 잉태되고 죄악 중에 출생한다(시5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그 피로써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을 때, 아담이 타락하여 범한 원죄를 대속하셨으니 아담 안에서 죽은 인류는 모두 대속 받아 죄에서 해방되었지만(히9:11~22), 이후 각자가 이 사실을 부인하고 그 죄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담의 죄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으로 인해 멸망한다(요3:17~18, 16:9). 그러므로 교회 생활의 첫 번 체험은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기 신분을 시인하는 것이요, 이는 생령의 근본이 타락한 그 근원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나 자범죄는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 수양이 안 돼서 품행죄를 짓기도 하고, 혹 품행죄를 절제했다 해도 행위만을 정죄하는 율법을 비켜가는 성품죄가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품행 이전의 미움이나 음심도 동일한 범죄로 취급하심으로써(마5:21~29) 율법을 완성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 품행죄와 성품죄는 보혈의 공로 안에서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써 거룩케 되었고, 또 성별된 삶을 통해 성화되지만 스스로 ‘나는 성결하다’말할 수 없음은 성품에 깔려있는 본죄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때에야 비로소 종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로 세상에 임하셔서 죄로 인해 멸망할 자의 죗값을 지불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으니, 대속하신 이가 값을 지불하고 사들인 것들을 당연히 자기 안에 두셨다(요6:56). 이렇게 자신을 피로 사신 이의 소유로 인정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침례를 받음으로써(롬6:1~11) 첫 아담에게 속한 땅의 사람이 죽고 인자, 곧 마지막 아담에게 속한 하늘의 사람으로 다시 나는 증거를 몸과 영에 가지게 된다. 이를 성령이 보증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는 당연히 자기 안에 두시는 그의 몸이요, 그 몸 안으로 불러들인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경영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하므로 하나님 아들의 영광과 복과 능력으로 충만케 하신다(엡1:22~23). 또한 성령님의 모든 권세와 은사를 한량없이 부어주시니 장차 영생에 들어갈 신약교회에게 주신 생명권세는 현실에서 사망권세인 음부를 심판한다(마16:18~1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신 하나님의 의요, 우리 믿음의 주이시다

(마17:5).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박덕규 목사

한라에 핀 샤론의 꽃

사랑받은 자의 모습

‘동전의 양면성’이란 말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적용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올바로 서있다면 반드시 열매로 맺게 된다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동전의 앞면과 같은 것이고, 그런 믿음이 있을 때 믿음의 열매를 맺는 것이 동전의 뒷면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동전의 뒷면처럼 나타나야할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

대학 후배 중, 늘 입버릇처럼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면 연애도, 결혼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던 후배가 있다. 이 말은, 본인은 그 어떤 것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던 후배가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을 만나 연애라는 걸 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더 이상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다니는 건 물론 자신이 원하는 것만 고집부리는 일도, 타인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이익을 좇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야구의 ‘ㅇ’자로 몰랐던 후배는 야구시즌이 되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으로 향하기까지 했다. 사회심리학자인 자욘스(R. Zajonc)는 함께 사는 부부는 물론 오래 사귄 연인들은 취향만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점점 닮아가고 심지어 심박수나 호흡주기도 서로 비슷해진다고 했다. 아마 대학 후배도 연애 초반엔 자신의 방식대로, 습관대로 상대를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받고 또 사랑하면서 상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상대방의 장점을 본받다 보니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꼭 닮은 하나가 되는 일, 이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기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이야말로 ‘예수님 닮은 삶’의 핵심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교회 출석률도, 성경적 지식도, 자동차 룸미러에 달고 다니는 십자가 모형도 아니다. 가짜 예수가 아닌 진짜 예수를 따른다면 우리 삶의 중심에 ‘사랑’이 흘러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을 위해주는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콩깍지가 씌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상대방의 입안에 고춧가루가 끼어있어도, 상대방의 뜻이 나와 달라도, 간혹 상대방이 실망스러운 행동을 해도 무한대로 이해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사랑한다. 문제는 서서히 콩깍지가 걷어지면서 나 자신의 바람과 기대를 강요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하지 않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자격과 상관없이 그저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의 부족함에도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셨다(습3:17). 어쩜 하나님도 눈에 콩깍지가 씌어있지 않았을 땐 이 악물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엡 4:2).

서로에게 숨 쉴 틈을 주고,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놔주는 것이 사랑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고, 상대를 변화시킬 책임감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예수님 닮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랑 쉽지 않겠지만 힘든 선택 위에 또 하나의 힘든 선택, 작은 사랑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사랑을 더하면서 날마다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점점 그분을 닮아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처럼 예수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Dr. 권정미 성도

참된 깨달음

아버지의 마음, 그 사랑!

몹시도 사랑하는 어느 권사님이 심방을 요청해 찾아뵙고 기도와 축사를 하는 중에 슬그머니 제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배에 얹습니다. 순간 복수가 차서 땡땡하게 팽창된 상태가 느껴집니다.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21일간 오전 금식을 하며 교구 성도님들과 함께 작정기도를 시작했고 어느덧 마지막 날, 깊은 묵상 중 소리 없는 눈물이 강을 이루려는 듯 흘러나옵니다. 문득 저의 깊음 속에서 고백되는 절규, “주님! 너무도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아파합니다. 족하오니 제 생명을 취하시고 저 고통 받는 당신의 양 떼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소서.”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습니다. 얼룩송아지 엄마 닮는다고 했던가요? ‘이 한 생명 주님께 바치겠으니 나를 따라오는 양 떼들을 축복해달라’(출32:32, 롬9:3)고 애통하며 절규하던 우리 목사님의 그 기도를 저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심령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고통받는 양 떼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의 유일무이한 사랑 말입니다. 온 우주 안에 이 은혜로 충만한데 마치 어리석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처럼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해 감각이 무뎌 있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는 사도 바울의 탄식이 결국 제 안에서도 터져 나옵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데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우리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주님의 희생의 사랑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거 같아 마음이 아프고 저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려고 다 주고 가셨는데, 나 같은 죄인 복 주시려고 다 이루고 가셨는데, 이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그 사랑이 우리 모두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부어져 회복의 역사가 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김정옥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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