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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라(눅15:4~24)

999호 · 2019-04-22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마리아를 통해서 인자(人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때가 되매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입니다.

이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제가 생각한 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구원, 곧 저와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수치와 모욕 앞에서 잠잠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다 버리고 벌거벗긴 채로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자존심이란, 스스로 자(自), 높을 존(尊), 마음 심(心)으로,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이며,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때에 따라서는 이 자존심을 버릴 줄 아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엉덩이에 종기가 난 여자 둘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진찰을 해야 하니 옷을 벗으라고 했으나 남자의사인 터라 두 여자는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는 살고보자는 심정으로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치료해서 완치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는 망측해서 도저히 못하겠다면서 병원 문을 박차고 나왔고, 종기가 악성으로 발전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누가 현명한 자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시리아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큰 용사였으나 갑옷과 투구만 벗으면 진물이 줄줄 흐르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에서 잡은 작은 히브리 계집을 통해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아람왕의 선처를 입어 이스라엘 땅으로 문둥병을 치료하러 옵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는 그를 맞이하기는커녕 사환을 보내어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그러니 나아만 장군이 노할 수밖에요. 나아만 장군은 선지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자기를 맞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선지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사환을 보내어 더러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 명색이 군사령관으로서 자존심이 무지 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진멸하고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의 종들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5:13). 즉 ‘문둥병이 낫기만 한다면야 그깟 자존심 좀 상하면 어떠냐?’ 이런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마음을 돌이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어린 아이 살처럼 되었습니다.

성경에 정말 위대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애가 탔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고, 그녀는 물어물어 예수님을 찾아와 딸이 낫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고 하신 겁니다. 졸지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얼굴이 뜨거웠겠습니까? 그런데 그녀는 달랐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답했습니다. ‘자식이 낫기만 한다면 개가 된들 어떠냐? 자존심 따위가 대수냐?’ 이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냥 못해준다고 하셔도 될 텐데, 그렇게까지 경멸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 왜 이 여인에게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생각하다 ‘이것은 테스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난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집회 때였습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케이프타운 공항에 도착했는데 영접 나온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기사와 낡은 봉고차 한 대만 보내진 상태였습니다. 그곳의 영적 대부인 로버츠 목사의 초청으로 갔는데 말입니다. 이에 우리 일행들은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 목사님이 이 먼 길을 왔는데….’ 하며 분개했습니다. 그때 제가 우리 일행에게 “남아공의 영적 대부라는 분이 나를 테스트해보지 않겠니? 그리고 이곳에 복음을 전할 수만 있으면 내 자존심 좀 밟히면 어떠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귀신이 떠나고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하자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지난 2011년 집회 때는 그분이 노구를 이끌고 2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를 영접해주었답니다.

제가 오늘의 성공을 이룬 것은 성도들에게 잘못했을 때조차 목사입네 하며 권위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 꿇어 용서를 빌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를 살렸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뭡니까? 사울은 왕이라는 자존심을 못 버려서 핑계만 댔지만, 다윗은 문무백관들이 있건 없건 ‘아이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했기 때문 아닙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 않습니다. 상사에게 자존심 부려봐야 승진만 못합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존심 내세워봐야 가정만 시끄럽습니다.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인 한신 장군이 어린 시절, 자존심을 버리고 동네 깡패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수모를 참아냈기에 훗날 항우를 제압하고 유방과 함께 한나라를 세운 것 아닙니까? 오늘날의 싱가포르가 세계 부국으로 자리 잡은 것도 초대 총리 리콴유가 자존심을 버리고 선진 열강에 원조를 요청했기 때문이며, 지금의 대한민국도 선진국은 물론 압제했던 일본에게까지 가서 배우고 도움을 청했기 때문 아닙니까?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는 자기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가 모두 탕진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그나마 잘한 게 있는데, 그것은 자존심을 버리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 큰소리 치고 나왔는데 죽어도 못 들어가.’ 그러면서 계속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나 먹으며 살든가 아니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이러면서 극단적인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자존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왔더니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며 기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아버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기만 하면 너무 기뻐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축복과 은총과 사랑을 쏟아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지를 못하고, 진솔하게 회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래봬도 내가 박산데’, ‘그래도 내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데’, ‘사장인데’, ‘내가 국회의원인데’ 이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일 뿐입니다(잠18:12).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으세요.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다가가세요. 자녀에게도 위엄만 부리지 말고 대화해보세요. 서로의 상한 마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내가 이래봬도 목산데.” 이러지 마시고 낮은 자세로 성도들에게 다가가세요. 성도들 역시 마음을 비우고 목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거래처와 자존심 대결하지 마세요. 솔직하게 대화하세요.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 역시 원한을 풀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고(눅18:1~8),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을 위하여 떡을 강청한 사람 역시 자존심을 버려 목적을 이뤘음을 기억하세요

(눅11:5~8). 아울러 왕비 와스디가 자존심을 부리다 아하수에로 왕에게 버림받았음도 기억하세요.

살다보면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버릴 때 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할렐루야!

성공하는 세일즈맨은

거절당했을 때부터 뛴다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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