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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라 (눅12:35~50)

992호 · 2019-03-03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더불어 이 땅에서도 한없는 복을 주셔서 머리가 되게 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 손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 기분 내키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정한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요12:48). 이 기준 안에 들어올 때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기준은 절대 움직이는 법이 없습니다. 기준이 마음대로 움직이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역시 줄었다 늘었다 하지 않습니다. 영원불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축복받고, 응답받는 길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사는 길은 항상 그 자리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듯 말입니다.

출애굽기 10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바로와 애굽 땅에 내리는 여덟 번째 재앙으로 온 천지가 흑암에 뒤덮인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는 사흘 동안이나 칠흑과 같은 어둠이 있었는데, 이는 애굽 백성들이 애쓰고 힘쓴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에는 광명이 있었는데 애굽 사람들이 광명을 찾는 길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으로 들어가는 길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고,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기준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40주야를 내리는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직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듯 말입니다. 고센 땅에 들어가면 누구나 빛을 받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듯, 하나님의 기준에 들어서면 누구나 차별 없이 구원을 받고, 능력을 받고,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축복을 못 받고, 여태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될 듯하다가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볼까요? 이 기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이 기준됨을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말함으로 우리에게 이를 재차 확인시켰고,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고 거듭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센 땅에 오면 누구나 광명을 맛보듯, 하나님의 기준 안에 들어서면 누구나 구원받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29~30).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을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기준인 것입니다.

축복의 기준은 좀 다양합니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중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기준은 이렇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신28:2).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나가도 복, 들어가도 복, 만지는 것마다 복을 주시고,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하시고, 머리가 되게 하시고,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준 안에만 들어서면 넘어져도 복이라는 겁니다. 말라기서에는 ‘십일조’라는 기준을 주셨고(말3:10), 에베소서에는 ‘부모를 공경하라’(엡6:2~3)고 하셨으며, 신명기에는 ‘구제’라는 기준선을 주셨습니다(신15:10). 그것을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의 기준은 기도임을 말씀하셨으며(막9:2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라고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여러분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잘라버리세요.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시어머니를 따라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긴 룻이 받은 축복, 세상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택한 라합이 받은 축복을 보세요. 시편 1장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자리에, 죄의 길에, 오만한 자리에 앉지도, 서지도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자리를 옮기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들어가는 것이면 ‘넉넉히’ 들어가야 합니다. 경계선 말고, 변두리 말고, 하나님의 중심에 들어갑시다. 경계에 있다 보면 순간 기준선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습니다. 사울이나 가룟 유다, 그리고 웃시야처럼 말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는 벨사살이란 왕이 나옵니다. 그는 귀인들과 큰 잔치를 하면서 그의 아버지인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기명에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이 기명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쓰여야 할 거룩한 것이었는데 망령되이 행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심히 모독한 것이고 엄연한 범법이었습니다. 그러자 큰 손가락이 나와 벽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벨사살 왕이 놀라 술객들과 점쟁이를 불러 이를 해석하라고 하나 아무도 그 말과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꿈을 잘 해몽하는 다니엘을 불러 그 뜻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에 다니엘이 풀이하니, 그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요,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었습니다. 이는 벨사살이 저울로 비유된 하나님의 기준에 필요한 무게가 극히 부족한 자로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되고 엄중한 심판을 받을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 경고대로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기준에 미달은 아닌지, 저울에 달아봤더니 근량 미달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올해는 하나님이 작정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가정과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준을 뛰어넘어 축복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분명히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본 적이 없고, 마음으로도 감히 생각해보지 못한 예비된 복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올해는 ‘내 차례’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14~21). 할렐루야!

복이 있는 자는

노는 물이 다르다

빛을 보기 원하면

빛이 있는 데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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