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기쁨!
지난 11월 25일, 예수중심교회 서울 청년부에서는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을 방문하여 어려운 이웃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사랑의 연탄’을 배달하였습니다. 이 날 10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여 8가구 1,600여 장의 연탄을 가정에 직접 배달하였는데, 특히 이번 행사는 청년들 모두 자비량으로 연탄성금을 모았고 배달까지 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연탄 나눔을 하는 당일,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주일예배를 통해 하늘의 상을 언급하셨는데, 이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고 싶은 청년들은 하나님께 칭찬받고자 이 날 그 누구보다 구제의 현장에 나가 앞장서서 일하였습니다. 전날 첫눈이 오고 비까지 와서 미끄러운데다가 마을의 지대가 높고 험해 연탄을 단체로 나를 수 없던 이들은 각자 두 장에서 넉 장까지 품속에 고이 안고 산동네 꼭대기 집까지 오르내려야 했지만, 이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청년들의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만 가득했습니다. 이에 지역주민들은 청년들을 웃음으로 맞이해주시고, 직접 물까지 따라서 청년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잠19:17)이라고 잠언기자가 말한 것처럼, 총회장 목사님 이하 우리 교단 성도들은 ‘한 손에는 복음을, 한 손에는 구제를’이라는 구호아래 그동안 다양한 곳에서 구제를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153구제운동이 그것입니다.
내 교회, 내 지역, 내 교구, 내 친척, 내 지인 중에 어렵고 소외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예수님 섬기듯 섬겨보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친절을 기억하시고 우리에 큰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직 2018년이 가려면 한 달이나 남았습니다. 한 달 동안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일을 합시다.
기자 송현혜 성도
charisma0691@hanmail.net
하나님 법 안에서
가을 운치를 누릴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뭐가 그리 급한지 속력을 내서 도로를 달렸다. 그렇게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내비게이션에서 삐~삐 경고음과 함께 속력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제한속도 70km구간이었다. 단속카메라에 이르기 전 속도를 줄이고 안전하게 구간을 통과한 나는 다시 한 번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내비게이션에서 경고음이 났다. 자세히 화면을 들여다보니 ‘제한속도구간’이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 단속카메라가 어느 한 지점을 통과할 때의 속도만을 측정해서 과속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는 달리 구간 단속카메라는 일정구간 전체의 평균속도를 가지고 과속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이었다.
단속지점을 통과한 뒤 속도를 높여서 목적지에 서둘러 도착하려던 나는 하마터면 단속에 걸려 범칙금을 낼 뻔한 것이다. 결국 나는 차 한 대 없이 뻥 뚫린 도로의 유혹을 잘 이겨내고 제한속도에 맞게 긴 구간을 잘 통과하였다. 그런데 순간, 아차 하며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멋지게 차려입었지만 진정 멋지지 않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혹시 내가 과속카메라 인생은 아니었나?”
‘인생이라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구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한속도, 곧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하는데 마치 과속카메라 단속 피하듯 그때그때만 상황에 맞춰서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간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니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체되기 전에 즉시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전도사라면서 순간순간을 모면하고 체면치레하듯 신앙생활 한 것을 용서해주세요.” 분명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변질된 내 모습을 주님 앞에 드러내고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께서 이내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고 기쁨으로 내 마음을 채우셨다. 그제야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흘러나오는 찬양을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에게 허락한 인생이라는 구간 내내 하나님의 법 안에서 사명을 잘 감당하련다.
이현승 전도사
coollee0817@naver.com
가난에게서 배운 것들
제가 일곱 살 때 부모님께서 중병으로 입원하시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한번 어려워진 형편은 몇 십 년이 지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요. 어머니께서 거의 외벌이로 일하면서 연년생인 자식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내셨는데요, 저희 집 형편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만 붙잡으며 그 길고 험난한 길을 힘든 내색 없이 감내하셨고, 저희 앞에서 단 한 번도 한숨을 쉬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생활 속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스가 끊겨 추운 겨울에 찬물로 씻어야 했던 일이라든지, 교복 살 돈이 없어서 헌 교복을 물려받아야 했던 일, 버스비가 없어서 동전을 긁어모았던 일, 이런저런 독촉 용지들을 받아야 했던 일이라든지. 그런 광야와 같은 생활 속에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듯 주님만 바라보며 저희는 자라났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금요철야며 주일예배며 산상집회며 모두 다녔는데, 그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저의 기도 제목은 장막과 물질의 축복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동안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지요. 가난 속에 있었을 때는 가난이 저의 콤플렉스였습니다만 지금은 가난했던 시절이 제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음을 압니다.
첫째로 가난은 제게 성실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대학생 때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 돼서 무조건 장학금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고,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해 8학기 동안 여섯 번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성실함은 습관이 되었고,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꼭 사장님들께 따로 보너스와 선물을 챙겨 받곤 했지요.
둘째로 가난은 제게 검소함을 길러주었습니다. 돈이 귀한 줄 알기 때문에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법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못 가진 것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불평하지 않지요. 그 덕에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제가 살고 싶은 동네에 독립해서 살게 되었고, 작년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생 때 가지 못했던 어학연수를 저 자신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또한, 가난은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인색하지 않은 마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옷을 사는 데는 돈을 아껴도 남에게 구제하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가난은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가족이 건강한 것에 감사.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음에 감사. 헌금할 수 있음에 감사.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음에 감사.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음에 감사. 남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조차 제게는 다 감사거리입니다. 누구보다 감사할 게 많음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홍해가 갈라지듯 순식간에 이뤄지는 기적, 그리고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도착한 가나안처럼 더디게 나타나는 기적. 이 느린 기적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괴로워하지요. 여기서 포기하면 광야는 우리의 종착지가 됩니다. 하지만 가나안이 있음을 알고 하루하루 걸어 나아갈 때 언젠가 광야의 길이 그저 경유지였음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 가난을 통과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나요? 그 힘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항상 동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지금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신은혜 성도
dopal0203@naver.com
인간은 누구에게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던 종교는 불교와 유교였습니다. 불교의 교리 윤회설은 죽은 뒤에 자신의 업보에 따라서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며 돌고 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거나 선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교는 내세보다 현세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하며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다로가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은 뒤에 세상을 어찌 알겠느냐?” 어쩌면 진솔한 대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가보지 않은 세계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시의 종교입니다. 우리 인생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복락의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영벌의 세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평강의 축복을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후 생기는 병을 ‘화병’이라고 말합니다. 화를 품거나 화를 내는 것이 여러 가지 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예증해주는 말입니다. 어떤 부인이 호흡장애로 병원을 찾았는데 진찰해보니까 오래된 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축적된 분노가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입힌 것이죠.
그런데 이와 비슷한 예로 방울뱀은 몹시 화가 나면 제 몸을 문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내가 화를 내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도 사실은 방울뱀처럼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화는 내 위주로 생각하며 내 방식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낄 때 일어납니다. 세상의 중심이 ‘나’여야만 하는데 상대가 내 말을 안 들으면 그가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고, 그 순간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나’ 위주로 생각하는 마음을 바꾸면 분노를 억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화를 내서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히려 화가 더 큰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화를 내면 몸속에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이 많이 나오면 불안, 두통, 불면 등의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장수와 평강’은 우리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있는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건강하고 평안한 삶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축복이므로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평강의 왕이시고(사9:6)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요14:27) 진정한 평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평강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평안이 더 월등하게 클 때 그 어떤 환경이나 핍박, 고통, 스트레스를 다 뛰어넘고 이길 수 있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살후3:16).
김정옥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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