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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을 잃은 호랑이가 되지 말라 (요1:12~13)

977호 · 2018-11-18

서커스단의 호랑이는 줄에 묶여서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어릴 때부터 사람이 주는 우유를 받아먹고 살았기 때문에 호랑이의 본성인 야성(野性)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는 맹수가 아닌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닭에게서 부화된 독수리는 닭을 어미로 알고 땅에 떨어진 모이나 쪼아대며 삽니다. 그 안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건만 닭장 안에서 푸다닥거리며 주인이 주는 먹이로 살게 됩니다. 기도원에서 기르던 비둘기는 풀어놓아도 기도원 근처를 못 떠나고 사람이 주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습디다.

야성(野性)이란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격’을 말합니다. 서커스나 하고 있는 코끼리, 밧줄에 묶여 재롱떠는 호랑이, 닭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독수리, 기도원의 비둘기…, 모두 본성과 야성을 잃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에게 본성을 찾아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여 옛집 근처에서 배회하겠지만, 배고픈 호랑이가 작은 토끼라도 한번 잡아먹게 되면 다음에는 사슴에 도전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더 큰 짐승도 잡게 되며 야성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독수리도 높은 벼랑에 올려놓으면 처음에는 날개를 못 펴서 그대로 곤두박질하겠지만 몇 번 하다보면 점차 날개를 펴서 하늘로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성을 잃은 교회와 본성을 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말해볼까요? 교회가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왜 안 그러겠습니까? 본질을 잃어버렸는데요. 본질을 잃고 세속화되고 문화화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오직 영혼구원에 매진해야 하건만 교회가 행사 위주로 가고 있으니 이런 폐단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친들은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그 능력으로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되레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왜요? 야성, 본질,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냥 종교인일 뿐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릅니다. 자신의 신분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야성을 잃고 세상에 동화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호랑이처럼 말입니다.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은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마취국’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에 마취되고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서커스단의 호랑이가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듯 그리스도인들이 문화를 즐기듯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지성인들의 삶이라 여기니 큰 문제입니다. 그것이 악한 마귀의 전략전술인데 말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려면,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갖추려면 야성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랑이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듯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자연으로 돌아간 호랑이가 점차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이 숲 속의 왕자라는 걸 깨닫게 되듯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과 음부의 권세가 감당하지 못하는 권세를 지니게 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할 때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큰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자신의 정체성, 신분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 것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16)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의 따르는 권세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무능력한 그리스도인이 정상이 아닙니다. 호랑이가 가는 줄에 묶여 끌려 다니는 것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이 받은 성령이나 믿음의 선친들이 받은 성령이나 동일함으로 우리도 권세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어디 이뿐입니까?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예수님보다 큰일도 하게 됩니다(요14: 12).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감히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겠느냐’고 합니다. 하긴 귀신만 쫓아도 잘못되었다고 하니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닭장에서 살던 독수리가 언덕에서 날아보겠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이요, 제사장이 지식을 버렸기에 그렇습니다(호4:6).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이 권세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70인의 집사들은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기이한 일을 행했는데, 우리는 귀신 한 마리 내쫓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다니고 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야성을 잃었다는 의미는 목적과 꿈, 길이나 사명을 잃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목적과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했습니다. 이런 자를 누가, 어떤 것이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저 또한 목회 34년 동안 한 번도 목적을 상실하거나 받은 바 사명을 부도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다. 조건이나 환경이 나빠도 굴하지 않고, 놀라지 않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며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본질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야성입니다.

여러분, 조련사에게 배운 호랑이는 야성을 잃습니다. 조련사는 호랑이의 야성을 없애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세상 지식으로 우리를 교육하려고 합니다. 야성을 잃어야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되면 우리가 비록 미련하고 약한 자이지만 지혜로운 자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양이도 호랑이에게 교육을 받으면 호랑이와 같은 기질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제 우리의 신분을 알았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세상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호랑이가 숲 속을 지배하고 독수리가 하늘을 정복하듯 우리도 하늘과 땅과 땅 아래를 지배하고 정복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할렐루야!

용장 밑에 약졸 없다

누구에게 배웠는가

생각보다

무서운 파괴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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