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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971호 · 2018-10-07

여러분, 제가 인생 70년, 목회 34년 동안 터득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인생사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보응을 자기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평생에 배추를 심고 무를 거두는 것을 못 보았고, 장미를 심었는데 국화가 나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성경도 말씀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고 딱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7:16). 그러니 어떤 것을 심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번 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다보면 뒤통수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려울 때 힘에 겹게 도와줬는데, 힘들 때 힘이 되어주고, 손을 펴서 베풀고 나누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뒤통수 칠 때 참 괘씸하고 화가 치밉니다.

저도 그런 일 많이 당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귀신을 쫓아주고 병을 고쳐주었는데 어느 날 목욕탕에서 마주치자 제게 이단이라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 사람도 있고, 제자들 중에서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과 협박을 하며 떠난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잘 되었을까요? 그들이 잘 된다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17:13)고 말씀하셨거든요.

다윗에게는 충신 우리아가 있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을 위하여 목숨을 내건 37명의 용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싸우는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그를 전쟁터에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은 경우입니다. 그 후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다윗이 회개하여 죄는 사함을 받았지만, 하나님 말씀은 한 치 오차도 없이 다윗에게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0~11)고 하셨고, 실제로 다윗의 집에는 재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골육상쟁이 이어졌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 등으로 다윗은 선을 악으로 갚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습니다. 사울에게 입니다. 사울이 골리앗으로 인해 고민할 때 어린 다윗이 나가 골리앗을 물리쳐주었고,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왔을 때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신을 쫓아주기도 했는데, 사울은 은혜를 갚기는 고사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녔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요? 그런 사람이 잘 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거라고요. 결국 사울은 그의 아들과 함께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절대 선을 악으로 갚으면 안 됩니다. 또 한 사례를 볼까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을 위해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라함 품으로 들여보냅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어찌 그 마음이 즐거웠겠습니까만 선한 마음으로 사라가 결정한 겁니다. 그런데 이 몸종 하갈이 아들을 하나 낳더니만 엉덩이에 뿔이 나서 주인마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주인행세를 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으면 결국이 안 좋은 법, 결국 하갈은 아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우리보다 조금 먼저 하늘나라로 간 박진수 목사의 아들 결혼식에서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전했습니다. 그것이 그들 부부의 가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래야 결국이 좋고 자자손손이 잘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래야 하고요. 악을 악으로도 갚지 말아야 하는데(롬12:17), 하물며 선을 악으로 갚고서 어찌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3:9)고 했고, 바울 사도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도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3~44)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롬12:21).

요셉이 그런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후로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지나 마침내 위상 높은 자가 되었을 때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에게 보복할 수도, 또 그런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자기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두려워할 때에 되레 형들 덕분에 이렇게 되었다고 그들을 위로했습니다(창45:8). 또한 세월이 흘러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혹시라도 요셉이 악을 갚겠다고 할까봐 형제들이 불안해할 때에 요셉은 다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창50:19~21). 당신들은 악을 베풀었으나 나는 악을 선으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유혹하다 그게 실패하자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몰았을 때도 보디발의 은혜를 잊지 않아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밝히지 않고 함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셉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지 않는 방법은 은혜를 알고,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부모를 길에 버리고, 양로원에 버리는 자, 스승의 은혜를 망각하여 대적하는 자는 다 개, 돼지 같은 놈입니다. 은혜를 잊기에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고, 선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의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10:2). 의리가 있으면 배신과 반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들도 능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저주하고, 힘들게 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고 말씀하시고 이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 또 마태복음 5장 48절에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하게 되는 것, 그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고, 더는 원수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며, 그가 주리면 먹이고 헐벗으면 입히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그 은혜에 빚진 자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온전한 자가 되기 위해 늘 애쓰고 있습니다. 저를 욕하고 떠난 제자들이 돌아오면 절대 그들의 잘못을 묻지 않고 받아주고 다시 기회를 줍니다. 용서란 과거를 다 잊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 기억하지 않으시고 잊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히8:12). 제 인생에 마지막 날이 온다면 저는 저에게 물을 것입니다. “네가 정말로 네 잘못을 회개하고 네게 죄지은 자를 용서했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리했노라’고 자신 있게 답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진심으로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 앞에 서야할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진정한 용서는

죄를 기억치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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