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꼰대일까
내가 연구실에서 홀로 보낸 석사과정 2년간은 선후배, 동기도 없었기에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하는 고된 시간이었다. 수업 조교, 행정 업무, 시험지 채점, 논문 작성 등의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다보니 연구실 한편에 침낭을 깔고 쪽잠을 자면서 일한 적도 많았다. 지금은 연구실에 제법 많은 후배들이 있어서 그 모든 일들을 나누어서 처리한다. 그런데 후배들이 알아서 나를 선배로 챙겨주고 음식점에서는 숟가락 젓가락을 먼저 챙겨주려고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를 보면서 ‘이렇게 나도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권위적인 꼰대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꼰대’라고 하면 나이 들고 꼬장꼬장하게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요즘에는 젊은 꼰대도 많다.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한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이를 이용해 남을 깎아내리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며 지적이나 충고를 일삼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한편 예수님은 이른바 ‘꼰대’와는 정반대의 삶을 사셨다. 늘 과부, 고아,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먼저 서셨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간음을 하다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온 무리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3~11)고 하시며 결코 의인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존경은 권리가 아니라 성취이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한 것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강요하지 않아도 존경은 나를 좇으리라.
김성일 성도
cre8tor@naver.com
안티(Anti-)에 감사하라
지난 8월에 있었던 청년대학부 연합수련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그 어느 때보다 최대 인원이 참가했고, 호응도도 가장 높았던 만족스러운 수련회였다.
앞으로 더 나은 수련회를 위해 올해 수련회에 참가한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모바일 설문조사를 했다. 이를 통해 수련회에 대한 청년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할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은혜가 넘치고 만족스러운 수련회였다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아쉬웠던 점과 개선해야 할 부분에 대한 솔직한 의견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필자가 담당했던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들이 돌직구처럼 날아와 필자의 심령을 흔들어 놨다. 그렇게 상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문득 떠오른 단어가 ‘안티(Anti-)’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안티가 있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증거고, 안티가 있으니까 더욱 성장하고 발전하는 거지!’
예수님도 안티가 있으셨다. 다니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지만, 고향에서 말씀을 전하실 땐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며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마침내 예수님을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다. 총회장 목사님은 이단이라고 종교재판을 받고 안수 받은 교단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셨지만, 묵묵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당신의 길을 가셨다. 오히려 안티들이 던진 돌들로 성을 쌓으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고, 그런 목사님을 들어서 전 세계 72개국에 복음을 전케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실 때는 그 일을 통해 우리가 더욱 성장하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안티는 그 계획의 일부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목사님처럼 누군가 던지는 돌로 내 성을 쌓다보면 그것들로 인해 내가 더욱 강해질 수 있으리라. 안티로 인해 기도하게 되고, 안티로 인해 더욱 노력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니 안티에게 되레 감사해야 한다. 안티 덕분에 분발하고 각성하는 나를 발견한다.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모태신앙과 성령충만
청년시절 파도타기를 배운 적이 있다. 충분히 교육을 받고 모래사장 위에서 모의연습을 마친 뒤 서핑보드를 발목에 단단히 묶고 바다로 들어갔다.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핑보드 위에 엎드려 팔을 저어 파도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파도를 맞닥뜨리는 순간, 부드럽게 파도 위를 오를 거란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서핑보드와 함께 그대로 파도 밑으로 고꾸라져 들어갔고 눈, 코, 입으로 밀려드는 짠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겨우 허리 위까지 오는 물높이였지만 파도의 높이가 더해지니 공포감이 들었다. 그렇게 수없이 고군분투하다가 제대로 파도를 타보기도 전에 완전히 포기했다. 지금도 높은 파도 위에 서서 바다를 가로지르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분명 나와 같은 서핑보드이고, 같은 파도인데 어떻게 멋지게 서있을 수가 있지?’
신앙생활에도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온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고 구하면 삶에 밀려드는 고통과 고난의 파도를 막아주실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수없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허락하신다. 오히려 예수를 만나면 필연적으로 더 큰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에 휩쓸려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 그 이상이다. 하나님이 들어 올려주시는 높은 파도 위에 우뚝 서서 바람과 파도를 지배하는 환희를 맛보라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파도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각자의 믿음의 근력대로 굳게 서서 기도로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번번이 파도에 쓸려 고통 받지 말고, 힘들어도 그 위에 서서 자유를 맛보는 사람이 되라고 응원하신다. 물살에 휩쓸려도 예수의 손이 우릴 단단히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신다.
나도 크고 작은 파도 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며 느끼는 상상 이상의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적으로 위압적인 파도가 밀려올 때면 몸이 움츠러든다. 그럴 때면 나보다 더 큰 파도를 타고 있는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힘을 얻는다. 그분들이 타고 있는 서핑보드가 내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 예수!!
이호은 사모
되새김질 ‘묵상’
어느 그리스도인이 유언비어를 만들어 유포하며 모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하루는 기도원에 들어가 울면서 “하나님 억울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없는 말을 만들어 저를 비난할 수가 있습니까?”라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마음속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이 무척 실망스럽고 섭섭했지만 곰곰이 묵상하는 가운데 “세상은 그럴 수 있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 순간 마음속에 큰 평안이 임했습니다. 율법적인 사고로 ‘그럴 수가 있느냐’며 따질 땐 상처와 아픔뿐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자 주님의 평강이 물밀듯 찾아온 것입니다. 그 말씀을 되새김질하니 모든 아픔과 억울함과 질병이 다 소화되어 녹아내립니다.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에 비유하는 묵상은 ‘소화된 사고’라 할 수 있는데, 소는 풀을 먹고 나서 그것을 첫 위장에 보냅니다. 그리고 먹은 것을 다시 입으로 올려 되새김질 후 다시 삼킵니다. 이 소화과정을 3회 되풀이하는데 소의 그 큰 몸이 어떻게 풀만 가지고 지탱되나 하는 의문점이 해결됩니다. 풀을 씹고 또 씹는 과정을 통해서 소는 풀이 가지고 있는 영양분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김질하는 묵상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김정옥 전도사
jcc011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