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를 싫어하는데 어쩌랴!
전하는 자의 기쁨은 듣는 자가 배운 대로 실천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함은 인생 범사에 선택권이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뜻한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도, 주일에 교회를 가고 안 가는 것도, 기도를 하고 안 하는 것도, 말씀을 묵상하고 안 하는 것도, 전도를 하고 안 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신앙적인 선택뿐 아니라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행하는 모든 일에 항상 우리는 선택하고 또 선택한다. 물론 누군가의 지시나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조언을 듣고 선택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최종 선택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때로 그 선택에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라도 그러하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신30:19~20).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신11:26~28).
하나님의 뜻은 아주 명확하다.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신만큼, 그 선택한 결과에 대해 책임도 져야한다는 사실이다.
목사님은 지난 수요예배 설교를 통하여 성령의 탄식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토로하셨다.
“내가 아무리 소리치고 몸을 불살라가며 불을 토하듯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듣기 싫다는데 낸들 어쩌랴!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린지라 아무리 얘기해도 공부시간엔 딴청피우다 나머지공부하려 하고, 그나마 나머지공부라도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결국엔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가다가 실컷 당하고 나서야 눈물 콧물 흘리며 찾아와 살려달라니 때는 늦으리, 낸들 어쩌랴!
‘선악과 따먹지 마라’ 해도 듣지 않고 따먹는 데야 하나님도 어쩌랴! ‘죄짓지 마라, 죄악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끊어버려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듣기 싫어하는 데야 어쩌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듣고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시기에 주의 종들을 세워 외치고 또 외쳐대시지만, 오늘 본문 말씀처럼 파수꾼을 세워 나팔소리를 들으라 해도 듣지 않겠단다. 선한 길을 알려줘도 그리로 가지 않겠단다. 그러니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이다.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원망, 불평을 쏟아내지만, 하나님 말씀하신다. ‘네 생각의 결과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법을 버렸으니 그 당연한 보응’이라는 것이다.
작금에 뉴스를 통해 보듯이 최고 권력자였든, 각계 지도자였든 죄를 지으니 포승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던가?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법을 떠나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듣기를 싫어하고 제 갈 길로 가는 자들의 결국에 대해 사도 바울도 경고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신다는 것이다. 그 정욕에 따라 온갖 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요한계시록에도 경고하셨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각자 행한 대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듣는 대로 깨닫고 돌이켜 재앙에 걸리지 말고, 사는 길로, 복된 길로 나아가길 바란다.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일지라도 그게 사는 길이요, 영생복락의 길이다. 생사화복이 네 앞에 있고 선택은 바로 네가 하는 것이다. 인생은 만드는 것이요, 행복도 만드는 것이다. 의지의 주인은 너 자신이니 네 생각이 네 의지를 다스리도록 하라.”
듣고 깨닫는 자가 복되다.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능력이다. 파수꾼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게 사는 길이다. 복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