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낸 사신을 감동시켜라 (마10:32~42)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몇 번이나 대접하셨습니까?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해요? 하고 싶어도 못하죠.” 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원에서 한 청년에게 제가 이와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청년 역시 황당한 질문이라 여겼는지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더군요. 저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가르쳐줬습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고,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란다.” 그 청년은 크게 깨닫고는 당시 청소년수련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대접했습니다. 그 청년은 한꺼번에 예수님을 수없이 대접한 것입니다.
‘어떻게 소자에게 한 것이, 어떻게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됩니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은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후송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울이 다메섹을 지나는데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이 누구냐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고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을 핍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듯, 소자에게 한 것이,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0~41).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를 잘 섬기는 수넴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 지역을 다니며 사역을 하는 엘리사를 위해 수넴 여인은 음식을 제공했고, 나중에는 남편과 상의하여 작은 방까지 준비하여 엘리사가 거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집에 아들을 주시고, 또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살려 되돌려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수넴 여인이 복을 받은 것은 선지자,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잘 대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을 지나다가 한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과부는 침통한 심정으로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사연인즉 과부는 나무를 주워서 통에 남은 가루 한 움큼으로 떡을 구워 아들과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 지역에 가뭄이 극심한지라 먹을 것이 넉넉지 않았으니 과부 집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선지자 엘리야가 그 떡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모자의 최후 한 조각의 떡을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때 어떡하시겠습니까? 드릴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러나 사르밧의 과부는 그 떡을 선지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비가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왕상17:14).
저는 엘리야가 그 떡을 무덤덤하게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동해서 아마도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먹었을 겁니다. 엘리야만 감동했을까요? 하나님도 감동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 모자를 넘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 상대가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기업은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 해야 하고, 가족이, 스승이 감동할 정도로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할 일일랑 아예 하지 마세요. 괜히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요, 돈 낭비만 됩니다.
하나님께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감정이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왜 복을 받았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왕이 된 솔로몬이 가장 먼저 한 것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예배를 일천 번 드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일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소 한 마리씩만 드렸어도 그 값이 얼마며, 번거로움 또한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감동하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고 하셨습니다. 감동하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원하는 것 다 줄 테니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돈이나 명예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또 한 번 감동시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혜는 물론이요 부와 영광도 그에게 주셨습니다
(왕상3:13).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를, 기도를 드리세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세요(요4:24).
순종을 해도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갈등하지 않고 아들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단칼에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침없는 행동에 하나님은 감동하시고 놀라신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그래서 그에게 큰 복을 주고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케 하신 것입니다.
찬송을 해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찬송을 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올 때 다윗은 너무 기뻐 하체가 드러나도록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을 본 아내 미갈이 다윗을 보며 ‘쯧쯧쯧… 태생이 목동이라 어쩔 수 없구나. 체통 좀 지켜라.’ 했을 때 다윗은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하고 다시는 미갈에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를 들은 하나님이 내색은 안 하셨지만 다윗에게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계보를 통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를 향하여 ‘나와 마음이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헌금을 해도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와서 귀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트렸습니다. 이를 본 어떤 이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지 그걸 왜 아깝게 깨트리냐?’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에 감동하셔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고 하셨고, 그의 오라비가 죽었을 때 살려주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귀한 향유를 받으셔서 감동하신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두렙돈을 보시고도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눅21:2~3).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라고 고백한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의 고백에도, 사자굴에 던져질 위험 앞에서도 당당히 믿음을 지킨 다니엘에게도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인 위에 높이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6일 베트남에서 개신교 각 교단 총회장님들이 대거 입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예수님 모시듯 마음을 다해 대접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이 일에 여러분도 동참하라고 독려한 것은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말고, 무임승차 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극진히 대접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주의 종이 왔을 때 그들의 발을 씻기고 떡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아 그들을 잘 대접했으며, 그들이 가는 길까지 전송했더니 노년에 아들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신을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감동이 없는 대접은
시간낭비, 에너지낭비다
인정받기 원하면
상대를 감동시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