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와 콜라의 차이를 알라(잠27:1~6)
생수와 콜라의 차이를 아십니까? 생수는 흔들려도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지만, 콜라는 흔들린 상태로 따면 난리가 납니다. 경험 있으시죠? 퍽하고 거품이 나와 옷 버리고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을요.
콜라 같은 사람, 많습니다. 조금만 감정을 건드리면, 조금만 인격에 손상이 오면, 조금만 자기에게 불이익이 오면 퍽하고 거품을 쏟아내는 사람, 곧 화를 내고 격하게 분노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성격이 원래 그래서요. 다혈질이라 그래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분노, 화를 내는 순간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아셔야 합니다.
성경말씀입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잠27:4). 창수(漲水)란 강물이 불어서 넘쳐나는 물을 말합니다. 홍수가 났을 때 급류 보셨지요? 그것들이 어디 인정사정 봐줍디까? 집이며, 자동차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다 쓸어가 버립니다. 남는 게 없다는 겁니다. 흔들린 콜라를 따면 다 쏟아져 정작 마실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25:28). 성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성읍을 방어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인데, 그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으면 적군이 들어와 다 죽이고 약탈해갈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민수기 20장을 읽어보면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에 이르러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를 손에 쥔 모세는 늘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여 그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그 결과로 모세는 그렇게도 그리고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신34:1~5).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역으로 해석하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욱하고 분노하면 사망이 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가인이 그랬습니다. 가인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땅의 저주를 받고, 떠도는 유랑자가 된 원인도 바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4:4~8).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칭송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성을 잃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다윗을 쫓다 결국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비명횡사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범죄자나 살인자의 특징이 뭔 줄 압니까?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쉽게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건사고 소식을 보면, 애인이 헤어지자고 하니 화가 나서 죽이고, 위층에서 소음이 많이 나서 화가 나 죽이고 이런 거 아닙니까? 욱하는 성질 정말 안 됩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7:9).
그러나 생수 같은 사람은 다릅니다. 생수도 많이 흔들면 약간의 거품이 일어나나 바로 가라앉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수 같은 사람은 화가 전혀 안 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29:11). 화 날 때 참는 자가 바보 같아보일지 몰라도 그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이며, 진정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들 앞에서 맞받아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래서 결국 승리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습니다.
여러분, 분노는 전염이 잘 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화를 내면
‘왜 화를 내?’라고 하면서 나도 화를 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먼저 화를 내면 아내는 더 크게 화냅니다. 혹여 남편이 무서워 밖으로 화를 표출하지 못한다면 속에서 씩씩거리거나 입을 다물어 버릴 겁니다. 내가 활을 쏘면 상대는 살려니까 방패로 대처하는 겁니다. 서로 간에 담이 쌓인다는 겁니다. 아내와 남편이, 자식과 부모가, 목사와 성도가 서로 상대를 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가정이, 기업이, 교회가, 그런 나라가 바로 서겠습니까? 그래서 그러셨을까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22:24~25)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콜라가 거품이 일어날 때는 뚜껑을 몇 번 치던지, 아니면 조금 기다렸다 따면 된다네요. 화가 나걸랑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말을 하든가 행동을 하면 평생 후회할 일은 안 합니다. 또한 상대가 화가 났걸랑 잠시 피하세요. 거품이 이는 콜라 옆에 있으면 내 옷도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천적인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아예 성령으로 거듭나야, 즉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온유’요, ‘오래 참음’이기 때문입니다(갈5:22~23).
사도 바울은 예수를 뵙기 전에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행9:1). 그런 그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옛 사람이 벗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매한 핍박과 환난과 모함에도 참고 이겨냈고, 더는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옥중에서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라’ 한 그의 편지가 그의 변화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니 혈기가 사라지고 온유한 자가 됩디다. 제 얼굴에서 사나움이 없어지고, 제 마음에 노가 사라집디다. 누가 저에게 욕을 해도 “안 보는 데서는 임금님도 욕하는데.” 하며 허허 웃게 됩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악한 마귀입니다. 악한 마귀의 최종 목적은 인간의 파멸입니다. 그래서 화나게 하고, 싸우게 하고, 그래서 결국 죽이게도 하는 것이 마귀의 궤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라고 말했습니다.
분노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정말이냐고요?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20~21).
여러분, 우리 모두 온유한 자가 됩시다. 늘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마5:5)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새겨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천하를 다스리는 영웅호걸보다
나를 다스리는 자가 더 위대하다
마음을 다스리면
천하를 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