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의의 기준을 갖고 사는가?(행10:9~16)
사람마다 의(義)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나 의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고, 그 분의 말씀이 의의 바로미터가 되며, 그분이 정하신 법이 곧 변개할 수 없는 의의 정의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습니다. 베드로는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가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네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그것을 잡아먹어라.” 그러나 베드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는 두 번째 음성이 들렸고, 이 환상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 성경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깨끗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에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의 가족과 식솔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이방인들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다 하면 정한 겁니다. 하나님이 ‘이것이 옳다’ 하면 당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든, 당신의 생각이 어떻든 그게 옳은 것입니다. 의의 기준은 온전히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예쁜 짓을 했거나 에서가 못된 행동을 해서 그랬다면 이해가 가지만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리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도 안 되고 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하셨으니 그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때론 사람이 생각하는 의, 우리가 정한 도덕, 우리가 판단하는 양심과 상반됩니다. 오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동이 난 사렙다 과부는 조금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먹고 아들과 죽으려 했습니다. 그 무렵 엘리야가 사르밧을 지나다 그 집에 유하게 되는데, 엘리야는 먼저 그 떡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멱살을 잡아도 시원찮은 일입니다.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말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머금고 선지자에게 그 떡을 넘긴 과부는 지면에 비가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왕상17:14).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사 그 과부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모든 사람과 육축까지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자건 아이건 다 죽이라는 겁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싹 쓸어버리라고 하면 싹 쓸어버려야 옳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름의 기준대로 아각도 살리고 좋은 양과 소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 아각을 칼로 죽였고,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를 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의 기준, 사람의 기준을 버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열심은 있으나 의의 기준이 잘못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로마서에는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를 가지고 열심을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잘못된 열심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다녔던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도 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로 열심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율법은 의가 되지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준이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의 기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율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를 의로 여기셨기에 율법의 완성이요,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가 의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분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게 살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선은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은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평생 악하게 살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강도는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하지요? 우리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지요?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아 낙원에 갔습니다. 살인마들이 감옥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합당한 일입니다. 반대로 평생을 선하게 살고, 평생 선행을 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여러분은 의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사람의 도덕, 양심, 방법… 이런 것들이 의의 기준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인본주의 습성을 낳을 뿐입니다. 그것을 깨야 합니다(고후10:3~4). 우리는 신본주의, 오직 하나님의 의의 기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의 기준, 신앙의 기준이 잘못되면 평생 신앙생활 하다가도 지옥가기 때문입니다.
66권의 성경을 한 구절로 요약하라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공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주의 종이 옳은 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의와 대립될 때 정확히 짚어줘야 합니다. 성도들이 떠날까봐, 성도들이 시험들까봐 주저하면 안 됩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이 나팔수로 세웠는데 나팔을 제대로 불어주지 못하면 그를 따르는 성도들을 다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겔3:17). 그리고 성도들은 주의 종이 하는 옳은 말을 들을 수 있는 큰 귀를 가져야 합니다. 쓴 소리에도 넘어지지 않는 맷집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 온갖 이론과 논리와 의의 기준이 판을 치는 세상을 이기고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기준에 위배된 것에는 가차 없이 훈계와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정도를 가르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제 손에서 피 값을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랜 신앙생활의 타성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기 나름의 의의 기준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목사님이 단에서 선포하는 말씀에 저울질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시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있걸랑 과감히 깨트려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됩시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자는 없다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