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려 얻은 빵과 돈보다 값진 것은 없다(요일3:1~12)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시련이나 역경이 오히려 약이 된다는 것이요, 어려움 속에서 일궈낸 성공이 더욱 값지다는 것이요, 대가를 치른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없는 성공은 뿌리 없는 식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비바람이 조금 거세도 바로 넘어지게 됩니다.
불현듯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부자 아버지와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야기입니다. 재산이 많은 아버지에게 늦게 얻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아들인지라 해달라는 대로 아까운 것 없이 다 해줬답니다. 그러니 아들은 당연히 모든 것에 헤플 수밖에요. 뒤늦게 아버지는 이렇게 키워서는 안 되겠다 작정하고, 하루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네가 직접 돈을 벌어오너라.” 돈을 쓸 줄만 알았지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의 요구에 당황하며 방을 나오자 이 말을 엿들은 어머니가 “걱정마라. 엄마가 돈을 줄 테니 네가 벌어왔다고 하면 된다.”고 아들을 도닥였습니다.
이틀 후, 아들은 어머니가 준 돈을 들고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돈을 벌어왔습니다.” 하며 돈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받고 아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활활 타고 있는 페치카에 돈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덤덤히 이를 바라다볼 뿐이었습니다. “이건 네가 번 돈이 아니야. 네가 직접 번 돈을 가지고 오라 하지 않았니?” 아들은 ‘어떻게 아버지가 눈치 채셨을까?’ 하고는 방을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것 역시 페치카에 던져 버리고는 직접 돈을 벌어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속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께 갔습니다. “아버지, 이 돈은 정말 제가 벌었습니다.” 하며 돈을 드리자 아버지는 이 돈도 페치카에 던져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내 돈! 안 돼요! 그거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하며 아버지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네가 번 돈이 맞구나. 돈을 벌어보니 돈의 가치를 알겠지?” 하며 아들을 힘껏 안았습니다. “네, 아버지.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끼며 살겠습니다.”
오동나무도 세 번 가지치기를 해야 혼례용 가구의 재목이 되고, 보리도 밟아줘야 튼튼한 보리로 자라고, 거센 파도로 인해 유능한 해군이 되듯, 고난은 사람을 만들고, 위인을 내는 훈련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고난은 위장된 축복인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일부러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끼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순간 어미 독수리는 재빨리 밑에서 받아 다시 둥지로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또 떨어뜨립니다. 이런 훈련을 계속 반복합니다. 새끼 독수리 입장에서 보면 생사가 오가는 것이기에 어미 독수리가 원망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 과정 속에서 새끼 독수리는 자신도 모르게 날개에 힘이 생기고 결국 창공을 훨훨 나는 강한 독수리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목회 32년 동안 저 역시 새끼 독수리처럼 수없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모함과 핍박은 물론이고, 맨 땅에 헤딩하는 것 같은 수많은 과정을 겪었고, 교단에서 제명되고 해외에서 추방되는 과정도 겪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폭포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제 날개에 힘이 있더란 말입니다. 제가 창공을 나는 강한 독수리가 되어 있더란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더욱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했더니 저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나타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넓이와 깊이가 더해졌으며, 더욱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더란 말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1~13).
그렇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의 40년을 통해 겸손하게 낮아져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고, 요셉에게 있어 이방의 노예생활이 그를 재상에 올려놓았으며, 야곱의 20년간의 도망자 생활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마치 시냇물 때문에 돌이 아프지만 결국 그것으로 모서리 나지 않고 둥근 조약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에게 닥친 환난이나 고난이 얼마나 컸는지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고 고백했고, 오죽하면 그는 살 소망까지 잃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그것을 이겨내고 유럽선교의 장을 열었을 때 그는 환희에 차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여러분, 고난은 터널과 같습니다. 참고 견디고 나가면 눈부신 태양이 빛나는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좌절하고 눈물 젖은 빵 때문에 낙심하면 그곳은 터널이 아니라 동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고통 중에라도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욥의 말이 여러분에게 소망을 불어넣어주었으면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뜨거운 용광로를 피하고 정금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주라는 보석은 오랜 세월동안 심한 고통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고난이 즐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고난으로 인해 정금이 된다면, 정금이 되어 내 가치가 상승되고 내가 하나님의 쓸 만한 그릇이 된다면, 고난을 노래할 수는 없지만 그 고난을 불평하고 낙심치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옷에 묻은 더러운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옷이 세탁기에 들어가 부대끼는 아픔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다니엘이나 다윗과 같은 믿음의 선친들도 다 고난을 통해 더욱 완성된 믿음을 가진 것이고, 우리 예수님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에 하늘과 땅과 땅 아래 권세를 하나님께 이양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 뒤에는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값지고 귀한 것이며, 쉽사리 놓치지 않는 여러분의 보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할렐루야!
고난 없는 영광이 없고
희생 없는 승리도 없다
대양의 거센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