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응답 받고 하는 것이다
“전쟁은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고 기도는 응답 받고 하는 것이다!”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이 말씀에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바탕이 깔려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믿음 말이다.
또 목사님은 말씀하신다.
“믿음이란 지금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세상의 우상들처럼 메아리 없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일 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기초를 잊어버리고는 당장 아무런 가시적인 표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원망한다.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 또한 기사와 표적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며,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해주실 분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실 때는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는 응답 받고 하는 것’이라 외치시는 것이다. 그 믿음을 가지고 시작해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고,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요, 간절함의 상실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어디까지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지 말씀한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는 사무친 원한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과부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의 원한을 풀어줄 사람은 오직 그 고을의 재판관이었다. 과부는 죽기 살기로 그 재판관을 찾아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재판관이 보아하니 이 과부가 무시하고 거절한다고 포기할 기세가 절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가는 언제까지나 자기를 귀찮고 괴롭게 할 게 뻔하다. 결국 재판관은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었다. 그가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은 어떤 공의나 대의에 떠밀린 게 아니라 오로지 징글징글한 과부를 피해보기 위함이었다. 사람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밤낮 부르짖는 기도에 귀찮아서라도 응답하지 않겠냐고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약점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마가복음 7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귀신 들려 삶이 죽을 맛인데 백방으로 찾아다녀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페니키아(시리아)에서 태어난 그리스 여인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귀부인인 셈이다. 그렇게 찾아온 여인이게 예수님은 자존심을 철저히 짓뭉개버리신다.
“먼저 내 자식부터 배불리 먹여야해. 너희 개들한테 줄 건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나를 개 취급하다니!’ 하고 욕하고 돌아서면 종치는 거다. 그러나 ‘내 병든 딸을 고칠 수 있는 분, 마지막 희망을 갖고 찾아왔는데 무슨 소리를 듣던 내 딸만 고치면 된다. 할 말은 그 다음에 하자.’하는 정신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은 목적을 이루었다. 기도는 이런 불퇴전의 자세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런 자에게 기도는 이미 응답을 받고 하는 것이요,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의 제목을 주셨다면 이는 이미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내 기도에 응답해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라면 내 앞에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자를 누가 말리겠는가? 가히 음부의 권세가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란 이런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들 뿐 아니라 악한 영들에게조차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 아닌가.
한은택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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