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눈을 떠라
육의 눈을 뜨면 저 사람이 예쁘다 못 생겼다, 풍채가 있다 없다 이렇게 보인다. 그러나 혼의 눈을 뜨면 저 사람이 지식이 있다 없다, 교양이 있다 없다 등 내적 가치를 보게 된다. 여기까지가 세상 사람의 눈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소경’이라 한다(눅6:39). 왜 그러셨을까? 영적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예수를 믿는 자라고 영적 눈을 뜬 것은 아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도 소경이었다. 그래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였다. 그러나 영물인 귀신은 예수를 알아봤다(막1:23~2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소경이었다. 실상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부유한 줄 알고 있었다(계3:17).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18). 영적 눈을 뜨라는 것이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 영적 눈을 뜨면 엄청난 세상이 보인다. 육의 눈이나 혼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세상이 전개된다. 예수님을 보고, 천사를 보고,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귀신들을 보게 된다. 또한 육적인 눈으로나 혼적인 눈으로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가치와 사고를 갖게 된다. 사도 바울이 문화적인 배경과 학문을 배설물로 여긴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소경 바디매오는 눈 뜨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려고 학수고대하다가 고침을 받아 눈을 뜬다. 육적인 소경은 자신이 소경인 줄 알기에 눈 뜨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영적 소경은 자신이 소경인 줄을 모른다. 정상인 줄 안다. 그래서 영적으로 눈을 뜬 자를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내라”(사43:8). 주의 종은 자기에 맡겨진 양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올바른 길로 가게 인도하는 자다. 그래서 더욱 영의 눈을 떠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적 눈을 떠라. 그것이 세상을 이기고, 오롯이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