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목표와 모호한 목표의 차이(눅11:5~13)
“올해 네 목표가 무엇이냐?”
지난 주 저는 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어떤 주의 종은 “부흥이요.”라고 답했고, 어떤 성도는 “부자 되는 거요?”라고 답했습니다. 참 모호한 답변입니다. 더는 어떤 사람은 아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어느 장로는 “빌딩 사는 거요.”, 어떤 집사는 “아내가 병에서 낫는 거요.”, 영상팀 한전도사는 “HD(고화질) 영상시스템이요.”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목표와 모호한 목표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대충 입력해서는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부자가 되겠다고 막연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1억’, ‘10억’, ‘100억’ 하고 구체적인 액수를 말해야 합니다. 또한 ‘120% 부흥’이라고 말한 인천의 장영국 목사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활을 당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표’란 인생의 나침반으로 어디로 가야 할 지 인생의 향방을 가늠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분명치 않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7~8). 삶의 목표를 상실한 자, 목표가 애매모호한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여리고 길목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겠다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고 그는 목청껏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를 부르셔서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바디매오는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51) 라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고 눈을 밝혀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고 하셨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7~9). 그랬더니 하나님이 부와 영광도 함께 주사 열왕 중에 이와 같은 이가 없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 보아도 그들은 하나님께 진정 필요한 것을 구했습니다.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모세가 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니 모세는 고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아들이 없어 끌탕을 하던 한나가 무엇을 구했습니까? 오직 아들이었습니다. 입다가 구한 것은 전쟁의 승리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딸의 병 낫기만을 갈망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밤중에 친구의 문을 두드린 자는 자기의 집을 방문한 친구에게 떡을 먹이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벗됨을 인하여서가 아니라 강청함으로 인해 떡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손자들에게 “뭘 먹을래?” 하고 물었을 때 “아무거나요.” 하는 애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피자’, ‘치킨’,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해야 사줄 거 아닙니까? 언젠가 어느 장로를 제 차에 태우고 일을 보고 돌아오다가 “어디다 내려줄까?” 하고 물었더니, 그 장로가 “아무데나요.” 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무데나 내려줬습니다. 택시 잡기도 모호하고 버스노선도 없는데 말입니다. 다음 날 전화해서 잘 들어갔냐고 했더니, 고생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고생해도 싸네. 분명한 사람이 되게나.” 하고 일침을 놔줬습니다.
사람은 매사 분명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 좋다’ 그런 소리보다 ‘분명한 사람이다’ 라는 소리가 훨씬 좋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기 전에 분명한 목표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중언부언 기도하게 될 것이고, 이런 자의 삶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부평초와 같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목적지가 없는 배가 표류하듯, 인생의 목표, 기도의 목표가 분명치 않으면 매일 그 자리일 게 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지금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구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가끔 “주님, 아시지요?” 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만 당신이 분명히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분명하게 기도하세요. “사업이요.” 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분명하게 청바지 장사인지, 음식장사인지 구체적으로 기도하세요. “교회 부흥이요.” 그러지 말고, “지금 50명인데 올해 100명이 되길 원한다.” 라고 하세요.
언젠가 책에서 읽었는데, 결혼을 앞둔 처자가 교회에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는 설교를 들은 후에 집에 돌아가 노트에 배우자감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놓고 기도를 했답니다. ‘키는 얼마정도고, 직업은 무엇이었으면 좋겠고, 성격은 어떻고, 가족관계는 이랬으면 한다’고 적어놓고 매일 기도하면서 읽었답니다. 나중에 결혼하고 보니 자기가 기도한대로 되었다고 간증으로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크신 분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섬세한 분이기도 하시기에 그런 것이고, 또한 이왕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저는 요새 기도제목이 확실합니다. ‘이 나라의 평화통일과 저의 건강회복’입니다. 이것을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 나라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주실 것이고, 저에게는 30대 기력을 회복시켜주셔서 30년 더 많은 일을 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풍병자인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간 네 명의 친구들, 그들은 많은 인파로 인하여 예수님 곁에 갈 수 없었지만, 친구를 낫게 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지붕을 뚫는 방법을 강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핍박과 환난 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한 것은 ‘푯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받을 상’이 확실한 목표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힘들어한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표가 분명해야 ‘기필코’라는 근성도 생깁니다.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을 하다 환도뼈가 위골되어버린 야곱, 날이 밝아오자 하나님의 사자가 떠나기를 청했으나 야곱은 축복을 받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며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습니다. 축복을 받겠다는 목표가 ‘기필코’ 라는 정신을 낳은 것입니다. 이 정신 앞에 하나님의 사자도 졌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축복하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었습니다(창32:22~32).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 문을 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갈멜산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해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렸고(왕상18:19~46), 엘리사는 기필코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겠다며 엘리야를 좇더니 그의 계승자가 되어 엘리야보다 큰일을 이뤘습니다.
여러분, 도끼로 나무를 찍을 때 한 곳을 계속 찍어야 넘어갑니다. 여기저기 찍으면 절대 안 넘어갑니다. 목표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응답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구하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이 기도한 대로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할렐루야!
‘필요’의 어머니는
‘기필코’ 라는 아들을 낳는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을
조목조목 적어 기도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