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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이벤트를 통해 깊어지는 믿음

864호 · 2016-09-17
평신도 묵상노트

왜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만나기를 그토록 열망했을까? 바울이 굳이 목숨을 거는 여행을 하면서까지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그들을 만나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렇게 편지를 써서 여러 가르침만 줘도 그들은 이미 믿음이 굳센 자들이어서 충분히 자신들의 잘못된 점을 고치고, 바울이 원하는 스페인(당시 땅 끝으로 알려진 서바나) 선교 사역의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인데, 왜 바울은 그들을 직접 보기를 원하여 늘 그렇게 기도해왔던 것일까?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로마 교인들에게 나눠주어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히 해주고, 자신도 그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 위해 그들을 만나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이미 온 세상에 소문날 정도의 믿음을 가진 로마 교인들에게 바울이 직접 가서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로마교회는 오순절 사건 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세웠기에, 그들 태반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누구보다 그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인데, 왜 이런 마음으로 그토록 그들을 만나기를 기도해왔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보고 싶다! 또 바울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었는데, 바울만이 가진 독특하고 특별한 은사인 성령 충만함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전염되고 번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로마 교인들은 이미 성령 충만해 있으나,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과의 만남은 그들을 더욱 풍성하고 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꼭 바울이어야 하는가? 그렇다. 꼭 바울이어야 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특별하게 열심히 믿고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거다. 그래서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 이 특별한 사람과의 만남은 정말로 특별하여,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신다. 바울은 그것을 알기에 그토록 로마 교인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면, 하나님도 눈여겨보신다. 우리가 금식하는 것과 기간을 정하여 기도하는 것, 주의 종에게 기도 받는 것, 특정 주제로 집회를 여는 것 등, 작정하며 하나님께 기대하면 하나님도 특별한 응답으로 화답하신다. 물론 하루하루가 특별하고 좋은 날이며, 어느 누구와의 만남도 소중하고, 그리스도인끼리 교제도 값지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일상의 삶에 하나님께서 멋진 이벤트도 마련하신다. 우리는 그 이벤트를 위해 많은 눈물의 기도와 희생,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도 각별하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나 믿음의 동역자들이 특별한 행사를 준비할 때, 적극적인 자세로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이벤트를 통해 크고 놀랍고 특별한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그 이벤트에 모두 당첨 되어 각자 간증거리를 가지게 되기를 소망한다.

박소향

bp650624@naver.com

겨자씨만한 믿음

믿음과 기다림

미국에서 네 살짜리 어린이들에게 마시멜로우를 하나씩 주고 바로 먹어도 되지만 15분을 참고 기다리면 마시멜로우 2개를 더 준다고 약속하고 아이들이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실험을 하였다.

이 유명한 ‘마시멜로우 실험’에서 70%의 아이들은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마시멜로우를 먹어버렸다. 나머지 30%의 아이들만이 마시멜로우의 유혹을 참아내고 약속한 2개의 마시멜로우를 얻을 수 있었다. 실험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뒤에 아이들을 추적하여 조사하였는데, 마시멜로우의 유혹을 이겨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더 건강했고,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에서 평균 200점이나 높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실험이다. 그 뒤에 2차 실험에서는 마시멜로우 그릇에 뚜껑을 덮어두어 안보이게 하였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더 오랜 시간을 참아냈다. 마시멜로우 3차 실험에서는 아이들이 끝까지 기다렸는데 마시멜로우를 더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 다음 실험에서는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다루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다음 실험에서 마시멜로우를 바로 먹어버렸고, 약속을 지켰던 상황의 아이들은 좀 더 인내심이 생겼고, 많은 아이들이 참아내었다. 아이가 절제력이 없다기보다는 신뢰를 주고받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절제력이 없다는 것이 이 실험의 결론이다.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성공도, 믿음도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론 인내가 힘이나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일

cre8tor@naver.com

세상을 보는 창

나와 하나님의 사이는?

심리학 교수가 어느 날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왜 사람들은 화가 날 때 언성을 높여 소리칠까요?” 그러자 대개의 학생들은 “마음의 평온을 잃어서 언성을 높인다.”고 했다. 교수는 또 질문했다. “그래도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왜 소리를 질러야만 할까요? 바로 옆에 있으니 작게 말할 수도 있지 않나요?” 라고 묻자 학생들이 선뜻 이유를 대지 못했다. 그러자 교수는 “두 사람이 화가 났을 때 마음의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에 마음의 거리를 뛰어 넘어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꼭 소리를 질러야만 한다.”고 말했다. 화가 심하게 날수록 마음과 마음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리를 더 강하게 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어떤가?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고 평소보다 더 작고 부드럽게 말을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과 마음의 거리가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 거리는 좁혀지고, 나중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눈빛만으로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410~450km,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250km이다. 거리로 보면 부산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이지만 심리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매번 서로 언성을 높이고, 제3국, 제4국을 통해서만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와 하나님과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것은 죄 때문일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사59:1~2).

죄를 인격화하면 사단이요 마귀다. 이는 하나님과 나를 이간질하고, 쐐기 박아 멀게 하는 악한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삶의 무게와 고통으로, 그리고 현실로 인해 어려워서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먼 거리에 서 있다고 느끼신다면 말씀과 기도로 거리를 좁혀 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참된 깨달음

웃음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원호병원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을 초청해 공연을 한 결과, 환자들은 공연이 진행되는 45분 동안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흔히 체내의 조깅, 에어로빅으로 불리는 웃음이 긴장, 불안감, 좌절감, 고통 등을 해소하거나 감소시켜준다는 것은 이제 만인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대체로 명랑한 사람은 하루에 100번에서 400번 정도 웃는데, 이 과정에서 근육조직이 당겨졌다 풀려졌다 하면서 몸의 긴장이 느슨해지는 효과가 생긴다고 하니 앞으로 더욱 많이 웃어야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총회장 목사님께서 단에 서실 때마다 성도들에게 “웃어봐! 하하하하, 한 번 더 웃어봐! 하하하~.” 하십니다. 처음에는 목사님을 따라 멋쩍은 억지웃음소리를 내다가 그 억지웃음과 표정들이 우스꽝스러워 진짜로 배꼽 빠지게 웃게 됩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면 기쁨이 샘솟듯 올라오는 걸 체험하지요. 아마도 근심 걱정과 스트레스로 인해 찌든 성도들의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시려는 목사님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생활의 원동력도 기쁨에서 출발해야합니다(빌4:4). 왜냐면 외부의 어떤 조건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은 분명 조건이 없어지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지만,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경험되어지는 깨달음의 그 기쁨은 외부적인 역경조차도 견디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뇌의 생리적, 물리적 자극에 의한 기쁨도 치유의 능력이 있듯이 신령한 기쁨은 신앙의 성숙과 더불어 전인건강을 누리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웃을 수 있는 여건을 매일 만들어 보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영적행복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것, 잊지 맙시다.

김정옥 전도사

jcc01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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