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정치
성경의 주인공은 문화나 인간이 아니라 예수다. 그의 구원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다. 즉 목숨이 아니라 생명이다.
바리새인들이 한번은 예수를 시험하는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물었다. ‘바치라’하면 반민족적이요,
‘말라’하면 로마에 항거했다하여 잡아갈 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하심으로 육과 영, 현실과 내세, 이 세상과 하늘나라를 구별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의 정치, 사회, 경제가 부패했기에 그것들을 야단치시고 정화시키려 하심이 아니다. 믿음을 가진 롯의 일가족을 구원하려고 천사를 소돔으로 보내신 것과 같이 그는 정치가나 경제학자, 철학자, 종교가가 아닌 구세주로 오셨다.
당시에도 위대한 헬라철학을 비롯한 최첨단의 로마 정치경제학, 그리고 수천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유대교와 바리새인의 도덕 윤리, 서기관들의 사회정의 등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도 세상은 멸망하겠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다. 이 땅에 마귀가 존재하는 한 부정, 불의, 죄악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는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이면 너와 우리를 구하라.”며 현실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하며 내세 구원을 요청했다. 주님의 응답은 영적 구원을 기도한 사람에게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한 번도 제자들에게 이 땅에 대한 소망을 주신 일이 없다. 이 땅이야말로 너희가 살 영원한 안식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진리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사회적 관계에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은 하늘나라보다는 세상에, 개인보다는 사회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정치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이름으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역사상 교회와 정치가 깊이 상호 관여했을 때 교권주의, 암흑시대, 타 교파박해, 타락, 전쟁 등으로 발전한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교회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회는 구령사업 하는 곳이지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을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대(對)사회사업은 전도를 위한 선교와 봉사의 두 가지 뿐이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신기류 목사
